암문(暗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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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에서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작게 설치한 문.

개설

성곽의 경우 네 방향에 거대한 성문을 만들어 두고 평상시에는 이곳을 통해 출입한다. 각 방향의 성문에는 옹성을 만들기도 하고, 성문 상부에는 중층의 문루를 지어 이곳이 성곽의 대문임을 멀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는 등 유사시에는 대문을 닫아 방어에 치중한다. 이때를 대비해 성곽 외부와 은밀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작은 문들을 성곽 곳곳에 만들어 두는데, 이를 암문(暗門)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암문은 대부분 성벽을 안쪽으로 휘게 해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에 설치한다거나 또는 성벽을 외부로 돌출시킨 다음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옆면 마구리에 설치하였다. 당연히 대문과 같이 옹성을 쌓는다거나 문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내용

암문을 통해 유사시에 외부와 연락을 취하며, 병기·식량 등의 물자를 조달하고,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역습을 가하기도 했다. 만약 암문이 적에게 노출된 경우에는 급히 메워 암문을 막을 수 있도록 문 안쪽에 돌과 흙을 쌓아 두었다. 『승정원일기』 1637년(인조 15) 1월 29일자 기록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서암문에서 적을 기습해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시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서암문 전투에 대한 내용은 『동춘당집(同春堂集)』 제23권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이시백(李時白)의 시장(諡狀)에 자세히 전한다.

한양이나 지방의 읍성과 같이 도시에 만들어진 성곽에는 암문을 설치한 경우가 드물다. 다만 정조 연간에 조성한 화성 성역에서는 5곳에 암문을 두었다. 고구려 이래로 적과의 전투를 대비해 도시 주변에는 산성을 조성했다. 평상시에는 읍성에서 생활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산성으로 옮겨가 이곳에서 전투에 임했다. 이런 까닭에 읍성에는 따로 암문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곽에 조성한 암문의 수는 성의 규모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형적인 여건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북한산성의 경우는 성문과 성문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중간에 많은 암문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1785년(정조 9)에는 북한산성의 안찰어사(按察御史)인 신기(申耆)가 북한산성의 행세를 보고하는 서계(書啓)를 올렸는데, 북한산성에 매우 많은 암문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정조실록』 9년 6월 17일).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에 따르면, 북한산성에는 10개의 암문이 있었다. 『승정원일기』 1779년(정조 3) 8월 3일자에는 남한산성에 사대문과 13개의 암문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김동욱,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수원성』, 발언, 1996.
  • 손영식, 『한국의 성곽』, 주류성, 2009.
      1. 그림1_00017952_화성의 서암문 도설, 『화성성역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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