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군(安城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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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경기도의 안성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안성군(安城郡)은 고려 초에 안성으로 이름을 고쳤고,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천안부(天安府)로 옮겨 소속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설치되었으며,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안성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공주부 안성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안성군에는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비로소 안성군이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송도에 침입하여 왕이 피난할 때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조선이 건국한 후, 충청도에 속해 있던 안성은 1413년(태종 13)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 지주군(知州郡)에는 5품 이상의 지주군사(知州郡使), 6품 이상의 부사(副使), 7품의 판관(判官), 8품 이상의 법조(法曹) 등이 파견되었다. 부사는 수령을 보좌하고 수령 부재 시 그 임무를 대신하였다. 판관은 군현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부서 간 업무를 원활하게 조절, 통제하면서 수령에게 보고하는 실질적인 2인자였으며, 법조는 재판과 관련된 실무와 법률자문을 하여 조선시대의 검률(檢律)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안성군에는 종4품 군수(郡守)와 종9품 훈도(訓導) 각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여지도서』에는 4품의 군수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5명, 아전 22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군(郡)에는 3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임무는 6방을 분장해서 좌수가 이·병방을, 좌별감이 호·예방을, 우별감이 형·공방을 맡아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맡았다.

변천

안성군에는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고려 때인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송도에 침입하여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는데, 양주·광주 일대의 주군(州郡)이 감히 적의 기세를 꺾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직 안성 사람들만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면서 연회를 베풀었다가 그 취한 틈을 타서 적의 우두머리 6명의 목을 베었다. 이로 인해 홍건적이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1362년(고려 공민왕 11)에 그 공으로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군(郡)으로 승격될 때 수원의 양량(陽良)·감미탄(甘彌呑)·마전(馬田)·신곡(薪谷)의 4부곡(部曲)이 안성에 편입되었는데, 뒤에 김용(金鏞)이 뇌물을 받고 마전·신곡을 수원으로 돌려주게 하였다. 조선 1399년(정종 1)에 양량을 떼어 내 양지현(陽智縣)을 설치하고, 나머지 3부곡은 없애 직촌(直村)으로 삼았다. 1413년(태종 13)에 충청도로부터 경기도에 소속시켰다(『태종실록』 13년 8월 1일).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공주부 안성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안성군(安城郡)
  • 『여지도서(輿地圖書)』 보유편(補遺篇)[경기도(京畿道)] 안성군읍지급읍사례책안성군(安城郡邑誌及邑事例冊安城郡)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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