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행궁(安山行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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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1797년(정조 21) 8월에 김포의 장릉(章陵)에 능행한 뒤 화성(華城)의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하는 도중에 임시로 안산 관아에 설치한 행궁.

개설

왕이 궁궐에서 벗어나 외부의 숙소에서 임시로 숙박 혹은 경숙(經宿)하는 곳이 행궁이다. 도성을 벗어나 원거리를 행행하는 능행, 원행(園幸), 강무, 온행 시에 임시로 숙소를 만들거나 관사를 이용하면서 행궁이라고 호칭하였다. 대부분의 왕은 행궁을 자신만이 아닌 고위 관원이나 지역 관장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행궁은 왕의 임시 처소이며 항구적인 궁의 역할은 하지 않았다. 왕의 항구적인 행궁이 설치된 곳은 많지 않았다. 남한행궁과 북한행궁, 강화행궁 등 보장처(保障處)의 성격을 지닌 곳을 제외하면, 왕이 행행한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여 지칭하는 것이 많았다. 능원묘의 참배를 위한 행행에서는 잠시 쉬어가는 주정소를 이용한 뒤 능·원·묘 내부의 재실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리하였다.

안산행궁(安山行宮)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행행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인 행궁이다. 왕이 안산행궁을 이용한 것은 김포의 장릉을 거쳐 화성의 현륭원에 가는 경우뿐이었다. 물론 조선전기에 사냥과 강무로 안산행궁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특히 안산 인근에 왕실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능·원·묘가 없고 왕의 보장처 등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행궁으로서 유지, 이용되지 못했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 9월에 현륭원에 원행하면서 안산행궁을 이용하고자 했으나, 9월 27일에 비가 많이 내려서 행행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1797년(정조 21)에 안산행궁을 이용하였다.

위치 및 용도

정조가 김포의 장릉을 거쳐 화성의 현륭원에 가는 도중에 경숙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행궁이다. 행궁으로 사용할 관아들은 퇴락해 있어 수리가 필요하여, 정조는 행행 이후에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게 했다. 안산행궁은 양천(陽川)과 부평의 행궁과 같이 수리하였는데, 2,220냥이 소요되었다.

안산행궁에 도달하는 여정은 도성을 지나 주교를 통해 한강을 건넌 뒤 노량진부터 고산현(高山峴), 방하곶지[方下串之], 영등촌전로(永登村前路), 당산리전로(堂山里前路), 양평리간포(楊坪里間浦), 주교염치현(舟橋鹽峙峴), 압천비립우(鵲川碑立隅), 양천현 주정소, 복정우부석리(卜定隅浮石里), 담포교(擔浦橋), 천등현(天登峴), 구분교(九分橋), 능소 동구(洞口), 김포행궁, 발라현(鉢羅峴), 부평부 주정소, 약대현(若大峴), 소도야현(小道也峴), 대도야현(大道也峴), 구음리고송현((龜陰里古松峴), 송우송언하교(松又松堰下橋), 중림천(重林川), 흘이천(屹伊川), 무지내방축두(無知乃防築頭), 석전이(石田伊) 등을 거쳤다. 정조는 1797년(정조 21) 8월 15일 양천현 주정소를 거쳐 김포에 도착한 뒤 장릉의 친제를 마치고 김포행궁에서 경숙하였다. 8월 16일 낮에 부평부(富平府)의 행궁에서 주정(晝停)했다가 40리를 지나 구포(鷗浦)에서 다시 주정하였고, 이후 25리를 더 가서 안산행궁에서 경숙하였다. 정조의 행차가 안산행궁에 이를 때는 장용영(壯勇營)과 훈련도감(訓鍊都監), 경향의 보군들이 호위하였다. 당시 장용영 대장은 선기대(善騎隊)와 경보군(京步軍) 2초, 향보군 3초, 훈국보군 1초를 선상군(先廂軍)으로 해서 안산까지 호위하였다. 정조는 안산행궁에 머물면서 다른 행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근 백성들의 소원을 처리해 주었다. 정조는 안산의 부노(父老)들이 1,000여 석에 달하는 구환(舊還)을 납부할 방법이 없다고 하자 처리해 주겠다고 했으며, 안산 주변에 있는 유명인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8월 17일 화성에 이르러 현륭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안산행궁은 정조가 장릉과 현륭원을 동일한 여정 내에서 소화하려는 방안으로 마련한 임시 행궁이었다. 정조의 능행 이후 안산행궁이 이용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7년(정조 21) 8월 16일에 부평행궁에서 안산행궁으로 떠날 때, 정조는 인근의 왕족 및 고관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명하였다. 정조는 당시 지방관 윤광석(尹光碩)에게 하교하여 숙원조씨(淑媛趙氏), 화유귀주(和柔貴主)의 무덤 근처로 어가가 지나갈 때에 내시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여천위(驪川尉)민자방(閔子芳)과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인 영신군(永新君)과 함원군(咸原君)의 무덤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고, 문간공(文簡公)이천보(李天輔)의 무덤에는 손자인 대교(待敎)이존수(李存秀)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정조실록』 21년 8월 16일).

1846년(헌종 12)에는 안산행궁에 모신 전패(殿牌)가 훼손된 일이 발생하였고, 전패를 훼손한 박용수(朴龍壽)와 유한원(劉漢源)은 주살(誅殺)되었다(『헌종실록』 12년 1월 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어영청거동등록(御營廳擧動謄錄)』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陵幸의 意義」,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김문식, 「조선후기 국왕의 南漢山城 행차」, 『조선시대사학보』60, 2012.
  • 나신균, 「인조~숙종대 행궁의 배치와 공간이용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柳承宙, 「南漢山城의 行宮·客館·寺刹建立考」, 『韓國史硏究』120, 2003.
  • 이왕무, 「영조의 私親 宮·園 조성과 행행」, 『장서각』15, 2006.
  • 이왕무, 「조선시대 국왕의 溫幸 연구」, 『국사관논총』108, 2006.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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