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군(安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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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안산군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안산군(安山郡)은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인 안산(安山)으로 정해졌다. 고려 때인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水州: 현 수원)에 소속되었고, 뒤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안산을 좌도에 소속시켰다. 현종 때에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정조 때 화성의 속읍이 되기도 하였으나, 조선시대 대부분 군 행정단위를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안산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안산군은 고려 초에 안산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그 후 감무가 설치되었다. 고려 때인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비로소 안산군이 되었는데, 고려 문종이 탄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안산군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고려시대의 지주군(知州郡)에는 5품 이상의 지주군사(知州郡使), 6품 이상의 부사(副使), 7품의 판관(判官), 8품 이상의 법조(法曹) 등이 파견되었다. 부사는 수령을 보좌하고 수령 부재 시 그 임무를 대신하였다. 판관은 군현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고 부서 간 업무를 원활하게 조절·통제하면서 수령에게 보고하는 실질적인 2인자였으며, 법조는 재판과 관련된 실무와 법률자문을 하여 조선시대의 검률(檢律)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조선초기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안산군에는 종4품의 군수(郡守)와 종9품의 훈도(訓導) 각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 진사 중에서 임명하여 군과 현에 두었지만, 조선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여지도서』에는 4품의 군수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2명, 아전 17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군에는 대개 3명을 두었는데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맡았다.

변천

안산군은 고려 때인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고려 문종이 탄생한 곳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에서 역적 나영록(羅永祿)이 살던 곳이라는 이유로 안산군의 읍호를 강등시키자고 청하였으나, 나영록이 항복해 온 왜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읍호를 강등시키지 않았다(『인조실록』 22년 6월 19일). 1663년(현종 4)에 온양 백성 생이(生伊)가 그 고을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훔친 사건이 일어나 현(縣)으로 강등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1월 15일). 1795년(정조 19)에 안산을 화성의 속읍으로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안산군이 되었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시행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순종 7)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시흥군과 수원군에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안산군(安山郡)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안산(安山)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