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변부(安邊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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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함경도 안변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안변부(安邊府)는 고려 1018년(고려 현종 9)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변군(安邊郡)으로 변경되기까지 함경도 안변 지방을 관할하던 주요 행정구역이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거의 전 시기에 같은 지명으로 존재한 함경도 유일의 행정구역이다. 군사적으로도 안변진관(安邊鎭管)이 설치되어 이웃 고을을 관할하는 등 함경도 남부 지방의 행정 및 군사상의 중심 지역이었다. 함경도 최남단의 고을로 조선초기 동북 지방 국토의 회복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천성군(淺城郡) 혹은 비열흘군(比列忽郡)이라 하였다. 신라가 차지한 556년(신라 진흥왕 17)에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설치하여 통치하였으며, 경덕왕 때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고쳤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등주를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고쳤다. 고종 때 정평(定平) 이남의 모든 성(城)이 몽골 군병에게 침입당해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로 옮겼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긴 지 거의 40년 만인 1298년(고려 충렬왕 24)에야 비로소 본래의 성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도 그대로 읍호가 유지되었다. 1402년(태종 2)에 이 고을 사람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 반란을 일으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도호부로 회복시켰다(『태종실록』 2년 12월 16일).

조직 및 역할

장관은 도호부사(都護府使)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편제하여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를 두었다. 이후 다시 도호부로 편제하면서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한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문관으로 임명하되, 품계는 당상관 또는 당하관으로 일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온다. 안변진관의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여, 덕원(德源)과 문천(文川)을 관할하였다. 임기는 30개월이었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목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30명, 아전(衙前) 42명, 겸리(兼吏) 5명, 공생(貢生) 15명, 관노(官奴) 44명, 관비(官婢) 31명이 있었다. 관아의 북쪽 25리쯤에 낭성포영(浪城浦營)를 설치하여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가, 1509년(중종 4)에 없앴다(『중종실록』 4년 8월 9일).

『여지도서』에 따르면 안변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관아가 있는 세청사(世淸社)를 위시하여 영춘사(永春社), 신리사(新里社), 모지사(毛只社), 위익사(衛翼社), 문산사(文山社), 방하산사(方下山社), 서곡사(瑞谷社), 영풍사(永豊社), 사동사(巳洞社), 상도사(上道社), 하도사(下道社), 학포사(鶴浦社)의 13사(社)가 있었다.

변천

1471년(성종 2)에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조 때 진관(鎭管) 체제를 시행할 때 진(鎭)을 설치하여 대도호부사가 첨절제사를 맡았다. 1509년(중종 4)에 다시 도호부로 강등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뀌었다. 따라서 안변부도 함흥부(咸興府) 안변군으로 개편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이듬해 다시 전국을 13도 1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함경남도(咸鏡南道) 안변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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