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진(阿耳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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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이산군에 속한 진(鎭).

개설

아이진은 여진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압록강의 상류에 설치한 진이다. 압록강의 상류와 하류를 구분하는 벽동군과 이산군(理山郡) 사이에 있었다. 초기에는 구자(口子) 형태였으나, 곧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둔 보로 승격시켰다. 성종과 연산군대에 여진족의 침입에 자주 노출되어 전략적 중요도가 높아졌고, 1595년(선조 28)에는 진으로 승격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다.

위치 및 용도

아이진은 평안도 이산군 아이면 성내리(城內里)에 있다. 이산군의 읍치에서 서쪽으로 55리(약 21.6㎞)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영조대에 병마절도사장태소(張泰紹)의 장계로 인해 아이면 전체의 토지와 인민을 예속하게 하였고, 다시 정조대에는 도호부를 별도로 설치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전기에 아이진은 압록강의 상류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자주 받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행정적으로는 이산군의 속진에 해당했으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사실상 독진(獨鎭)으로 기능했다.

변천 및 현황

아이는 압록강 상류의 한 지명으로 1403년(태종 3)에 벽동군(碧潼郡)이 설치되면서 여기에 속했다. 1442년(세종 24) 도체찰사이숙치(李叔畤)의 건의로 병마만호를 두었다(『세종실록』 24년 1월 17일). 초기의 아이구자는 벽동군의 읍치에서 북쪽으로 70리(약 27.5㎞) 거리에 있었는데, 험지에 일부 석축을 두르고 나머지는 잡석과 가시나무 등으로 막아놓은 허술한 형태였다(『세종실록』 32년 1월 8일). 아이구자는 유사시 백성들의 입보처로서 기능했는데, 벽동과 이산 사이에 위치했으므로 입보할 지역을 선정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거론되었다(『세조실록』 4년 12월 13일)(『세조실록』 4년 12월 13일). 대체로 여름에는 구자에 병력을 투입하여 농민을 보호하고 겨울에는 읍성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거리나 지리적인 요소로 인해 아이구자는 벽동보다는 이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460년(세조 6)에는 아이구자가 일시적으로 혁파되고 오음회리(吾音會里)에 책(柵)을 설치하여 대평보(大平堡)라고 칭하여 백성들을 입보하게 하였으나 곧 아이구자를 복설했다(『세조실록』 6년 5월 18일). 아이보는 거주하는 백성들과 겨울철에 입보할 백성들의 수가 많았으므로 성보(城堡)를 짓고 만호를 다시 두어 벽동과 이산을 모두 지원할 수 있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11월 12일).

아이보는 성종~연산군대에 여진족의 잦은 침입을 받게 되었다. 아이보는 벽동과 이산 사이에 있었는데, 두 군 사이에는 동건강(童巾江)이 있어 백성들의 입보가 용이하지 않았다. 따라서 입보할 백성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동건강을 기준으로 벽동과 이산의 경계를 나누게 되면서 아이보는 이산군에 속하게 되었다(『성종실록』 6년 8월 21일). 그러나 그 뒤에도 벽동군에 속한 지역으로 아이보에 가까운 곳은 아이보에 입보하게 하고, 또 아이만호는 여름에 벽동의 비아리보(非兒里堡)에 들어가는 등 정확하게 획정되지는 않았다. 이는 아이보가 여진족의 잦은 침입을 받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벽동과 이산의 전략적 연결 고리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전략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1595년(선조 28)에는 아이보를 진으로 승격하고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강성해지고, 곧이어 후금(後金)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평안도의 방어가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면서 아이진은 한동안 그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淸)에 신하로서 예속된 이후에는 아이진을 포함한 압록강 방어의 전략적인 중요성이 낮아지게 되었다.

1751년(영조 27)에는 아이진의 첨절제사를 변지과(邊地窠)로 만들게 된다(『영조실록』 27년 1월 17일). 또 이산군의 아이면 전체를 아이진에 귀속시켜 독진으로 기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면의 백성들을 이속하는 문제로 이산군과 아이진은 갈등을 겪게 되었다(『정조실록』 4년 7월 23일). 이로 인해 아이진을 별도의 부(府)로 승격시키는 문제도 논의되었으나, 영의정김상철(金尙喆)이 아이면에 속한 8개동만으로는 읍치를 둘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1790년(정조 14) 아이진의 첨절제사는 가덕진(加德鎭), 신광진(神光鎭), 평남진(平南鎭)과 함께 구근과(久勤窠)가 되었다(『정조실록』 14년 9월 10일).

형태

아이진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9,784척, 높이는 3척이고, 성안에 3개의 우물과 2개의 창고가 있었다. 본래 병마만호를 둔 보였으나, 1595년(선조 28)에 첨절제사의 진으로 승격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아이보는 둘레가 5,784척(약 1,753m), 높이가 3척(약 0.9m)이며, 3개의 우물과 1개의 창고가 있었다. 금사동보(金士洞堡) 등 두 보를 폐지하여 아이진으로 합설하면서 4,000척가량을 늘려 쌓고 1개의 창고를 추가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산양회보봉수(山羊會堡烽燧)와 벽동군의 광평봉수(廣坪烽燧)를 잇는 아이진봉수가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선향토대백과』, 사단법인 평화문제연구소, 200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