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지보(阿吾地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함경도 경흥진관에 속한 병마만호진.

개설

아오지는 처음에 함경도 경원부(慶源府)에 속하였다가 성종대에 경흥부(慶興府)로 이속되었고, 만호(萬戶)를 두었다. 이곳은 여진인이 자주 침범하는 곳으로, 두만강 연변의 요충지였다. 후일 아오지보의 군액(軍額) 등이 감소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고종대에 조산(造山)에 합쳐져 혁파되었다.

명칭 유래

여진어로 검은 돌, 즉 석탄을 뜻한다. 조선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아오지’란 단어를 음차(音借)한 것이다. 실제로 이 지역은 아오지 탄광으로 유명한 갈탄지대이다.

위치 및 용도

아오지는 현재 함경북도 경흥군 학성리이다. 동쪽으로 나선특별시, 서쪽으로 경흥 시가지, 북쪽으로 두만강을 사이로 중국 국경과 접한다. 아오지보는 두만강을 건너 바로 여진의 땅과 맞대고 있다. 이곳은 경흥부를 방어하기 위한 요충지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은 건국 초부터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공주(孔州)에 석성(石城)을 쌓고, 경원(慶源)이라 개칭하여 부(府)로 승격시켜 용성(龍城) 이북을 예속시켰다. 아오지도 이와 궤를 같이하여 조선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1410년경(태종 10) 아오지에 목책(木柵)과 성(城)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이 시기에는 조선에서 이곳에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태종실록』 10년 4월 23일)(『태종실록』 10년 4월 28일).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이 거세 경원의 주민들을 경성군으로 이주시키면서 아오지 역시 잠시 방기되었다. 10년 후, 경원의 부가참(富家站)에 다시 부를 세우면서 아오지가 경원부에 속하였다.

이후 1476년(성종 7) 1월에 영안북도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여의보의 요청에 의해 두만강 변에 새로 보루(堡壘)를 쌓고 만호를 두기로 하였다(『성종실록』 7년 1월 6일).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1509년에 신설한 아오지보에서 약 20리(약 8㎞) 떨어진 옛 기지[舊堡]로 다시 옮겼다(『중종실록』 4년 4월 29일).

아오지는 지리적으로 경흥에 가까웠기 때문에 경흥부(慶興府)가 발전하면서 아오지의 예속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1479년에 아오지를 경흥부에 이속하기로 하였다(『성종실록』 10년 3월 21일). 한편 1487년에는 아오지에 둘레 3,369척(약 1,021m), 높이 8척(약 2.4m)의 성을 쌓았다(『성종실록』 10년 3월 21일).

조선후기에 아오지 등의 백성들이 두만강을 통해 도강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특히 1869년(고종 6)에 아오지의 백성뿐만 아니라 군사들까지 비적(匪賊)의 무리에게 호응하여 일제히 배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종실록』 6년 10월 21일). 결국 1883년(고종 20) 11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이 관북(關北) 지방에서 긴요하지 않은 각 진보(鎭堡)를 부근의 각 진보에 합하자고 주장하였고, 이때 아오지를 조산에 합하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관련사건 및 일화

1410년(태종 10) 3월에 조선은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조연(趙涓)을 보내 여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조선군은 두문(豆門)에서 모련위(毛憐衛)의 추장 유파아손(劉把兒遜) 등 160여 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다른 여진인의 저항을 받았고, 같은 해 4월에 아오지동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 병마사(兵馬使)곽승우가 이끄는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조선군은 사망자 73명, 부상자 52명이며, 전마(戰馬) 120필과 병갑(兵甲) 24부(部)를 모두 적(賊)에게 빼앗기고, 곽승우도 화살에 맞았다(『태종실록』 10년 4월 13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전회통(大典會通)』
  • 『제승방략(制勝方略)』
  • 『관북읍지(關北邑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난중잡록(亂中雜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