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보(阿山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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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원진관에 속한 만호진.

개설

아산보는 함경도 경원의 두만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세종대에 처음 운영되었다. 이후 성종대에 성을 쌓는 등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아산보는 압록강 하류의 여진 세력을 방비하기 위한 요충지로, 여러 차례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아산보는 군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말까지 운영되었다.

지명유래

언덕[阿]과 산[山]이 많은 고장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위치 및 용도

아산보는 조선시대에는 경원부에 속해 있었고, 현재는 함경북도 경원군 아산리와 경흥군 신아산 일대에 해당한다. 두만강을 건너 바로 여진의 땅과 맞대고 있기 때문에 두만강 연변과 내륙의 한성 등의 방어에 매우 중요하였다.

변천 및 현황

아산보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대로 1423년(세종 5) 9월에 혐진올적합(嫌進兀狄哈) 거을가합(巨乙加哈) 등 40여 명이 쳐들어왔다는 내용이다(『세종실록』 6년 5월 21일). 1441년 5월에 도체찰사(都體察使)황보인의 의견에 따라 건원구자(乾元口子)를 없애고 아산장(阿山場)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관방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23년 5월 19일).

1487년(성종 18)에 아산참(阿山站)에 성을 쌓았고, 이듬해에는 옥련보(玉蓮堡)·안원보(安元堡)·조산보(造山堡) 등과 함께 아산보에 높이 7척(약 2.1m), 둘레 1,852척(약 561m)의 성을 쌓았다(『성종실록』 18년 3월 20일)(『성종실록』 19년 3월 29일). 한편 1492년(성종 23) 1월에 평안도와 함경도 각 진보의 만호를 충원할 때, 위흥위(義興衛)·용양위(龍驤衛)·호분위(虎賁衛)·충좌위(忠佐衛)·충무위(忠武衛) 등 5위의 부사용(副司勇)에서 차출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23년 1월 12일). 이때 아산 역시 그 대상에 올랐다.

아산보는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으며 1883년 11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관북(關北) 지방의 진보(鎭堡)를 통폐합하였고, 아산에 건원을 합하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관련사건 및 일화

세종 초년에 혐진올적합이 두 차례에 걸쳐 이곳을 침입하였다. 특히,(쉼표 삭제) 1424년(세종 6) 5월에 혐진올적합 100여 명이 공격해오자 고랑기이(高郞岐伊)의 유방군(留防軍)이 맞서 싸웠다. 이때 경원첨절제사(慶源僉節制使)이징옥 등이 적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세종실록』 6년 5월 21일).

1493년(성종 24)에 아산보의 양인(良人) 채옥동과 채귀석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다가 올적합에게 잡혀갔다(『성종실록』 24년 7월 30일). 당시 조선은 1491년(성종 22)에 ‘신해북정(辛亥北征)’을 통해 혐진올적합을 공격하여 아직 안정적인 관계를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조정은 이에 대한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관련자들인 경원부사(慶源府使)김곤(金坤)를 비롯하여 아산만호(阿山萬戶)·경원판관(慶源判官)·우후(虞候)·평사(評事)·절도사(節度使) 등에게 벌을 내렸다(『성종실록』 24년 12월 13일)(『성종실록』 24년 12월 23일).

아산보는 1583년에 발생한 ‘니탕개(尼湯介)의 난’과도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조선 변장(邊將)들의 침탈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산보 관할의 추장인 우을지(迃乙知)가 ‘전 만호최몽린이 번호(藩胡)를 침학한다’고 소문을 내며 근방에 전통(箭通)을 보내 난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산보만호 유중영은 토병(土兵) 몇 명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을지가 이들을 잡아서 심처야인(深處野人)에게 보내고 아산보를 습격하였으나, 유중영 등은 일단 방어하였다. 한편 경원부사김수는 아산의 토병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강을 건너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적에게 포위당한 후 간신히 도망쳤다. 결국 우을지 등이 경원성을 함락하며 ‘니탕개의 난’이 크게 번졌다(『선조수정실록』 16년 2월 1일). 이처럼 아산보는 ‘니탕개의 난’ 발생의 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관북읍지(關北邑誌)』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박정민, 『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문화사, 2015.
  • 한성주, 「임진왜란 전후 女眞 藩胡의 朝鮮 침구 양상과 조선의 대응 분석」, 『동양사학연구』13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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