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조홍범(十四條洪範)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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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십사조홍범 |
한글표제 | 십사조홍범 |
한자표제 | 十四條洪範 |
대역어 | 홍범십사조(洪範十四條) |
관련어 | 건양(建陽), 자주독립(自主獨立), 청일전쟁(淸日戰爭), 갑오개혁(甲午改革), 갑오경장(甲午更張), 을미사변(乙未事變), 아관파천(俄館播遷) |
분야 | 정치/정치운영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정욱재 |
시행시기 | 1894년(고종 31) 12월 12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십사조홍범(十四條洪範)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1년 12월 12일, 『고종실록』 31년 12월 12일, 『고종실록』 35년 7월 22일 |
1894년(고종 31) 12월 갑오개혁을 통해 자주독립국가의 터전을 조성하고 황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순으로 선포한 조문.
개설
조선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을 진행하면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근대적 자주독립국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고종은 이런 국가적 변모를 국내외에 홍범14조(洪範十四條)로 드러내었다. 홍범14조의 강령은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로 한문, 국문, 국한문 혼용의 세 가지 문체로 작성하여 선포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94년 청일전쟁의 승패가 일본의 압도적인 우세로 기울어진 12월에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갑오개혁은 6월에 설치된 군국기무처에서 주도하였다. 주요 내용은 왕실과 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일본의 입헌 군주제적 정치 체제를 도입하기 위해 청나라의 중화 체제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을 지향했으며, 홍범14조를 반포하여 대내외적으로 자주적 황제국으로 변모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려고 하였다.
내용
1894년 12월 12일 고종은 홍범14조를 발표하기 전에 왕세자를 대동하고 종묘와 영녕전에 가서 자주독립의 황제국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담긴 서고(誓告)를 올렸다. 이때 고종은 서고 중에 ‘짐(朕)’, ‘자주독립’의 용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국가 체제로 나아갈 것임을 천명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12일). 고종은 서고 중에 홍범14조도 언급하였다. 홍범14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터전을 튼튼하게 세운다.
2. 왕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 및 종친과 외척의 본분과 의리를 밝힌다.
3. 왕은 정전에서 시사(視事)를 보되 정무(政務)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재결(裁決)하며 왕비나 후궁, 종친이나 외척은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다.
4. 왕실과 국가의 사무는 반드시 분리시키고 서로 뒤섞지 않는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와 권한을 명백히 제정한다.
6. 백성의 세금은 법령에 정한 비율로 하고 불법적으로 징수할 수 없다.
7. 조세 부과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8. 왕실이 스스로 비용을 절약하여 각 아문과 지방 관청의 모범이 된다.
9. 왕실과 각 관청의 비용은 1년 예산을 미리 정하여 재정 기초를 튼튼히 세운다.
10. 지방 관제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하고 재주 있는 젊은이들을 외국에 파견하여 학문과 기술을 전습받는다.
12.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사 제도의 기초를 확정한다.
13. 민법과 형법을 엄격히 제정하고 함부로 감금 및 징벌하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14. 인재 등용은 문벌에 구애하지 말고 조정과 민간에서 널리 구한다(『고종실록』 31년 12월 12일).
변천
갑오개혁은 이어서 발생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홍범14조에 근거한 자주독립의 정책은 지속되었다. 고종은 1897년(고종 34) 2월에 칭제건원(稱帝建元)의 하나로 광무(光武) 연호를 정하고 8월 16일에 조칙으로 연호를 선포하였다. 또한 10월 12일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였다. 물론 고종의 정책은 황제 독재를 강화하는 것으로 독립협회 등 국내의 개화 지식층이 원했던 서구의 입헌군주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윤치호 등은 당시의 폐단을 일신하고 제국의 틀을 잡는 방도로 홍범14조를 다 준수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고종은 윤치호 등의 요구를 거절하고 황제권의 강화에만 주력하였다(『고종실록』 35년 7월 22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계년사』, 1971.
- 왕현종, 『청일전쟁기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전략』, 동북아역사재단, 2009.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실, 『청일전쟁을 전후한 한국과 열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구선희, 「청일전쟁의 의미:조·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 국사편찬위원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한국사』4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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