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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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심양으로 행차한 청나라 황제를 문안하기 위하여 특별히 파견한 사신.

개설

강희제 이후, 능 참배를 목적으로 심양을 방문한 청 황제를 문안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부정기적으로 파견한 사신이었다. 정기사행에 비하여 사신단의 전체적 규모는 소략하였다. 정사와 서장관만 파견하고, 부사는 제외하였다.

담당 직무

『통문관지』의 설명에 의하면, 문안사는 황제가 순행(巡幸)하다가 조선의 국경에 가까이 이르는 경우에 파견한다고 되어 있다. 조선이 문안사(問安使)의 호칭으로 심양(瀋陽)에 사신을 파견한 사례는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인조 16)부터 수차례 확인되지만, 이 경우는 청이 아직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기 이전이라 수도인 심양에 머무르는 황제를 문안하러 간 것이었다. 1644년(인조 22) 청이 북경(北京)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1654년(효종 5) 심양으로 순행한 순치제(順治帝)를 문안하기 위하여 정사인평대군(麟坪大君)이요(李㴭)와 서장관심세정(沈世鼎)을 파견하였지만, 황제가 순행을 중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효종실록』 5년 8월 26일). 따라서 실제로 조선이 심양으로 순행 나온 황제에게 문안사의 호칭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은 1671년(현종 12)낭선군(朗善君)이우(李俁)의 사행(使行)이 처음이었다(『현종실록』 12년 10월 22일). 성묘를 목적으로 심양에 온 강희제(康熙帝)가 문안사가 도착하기 전에 남쪽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이우의 문안사행은 북경까지 황제를 따라 갔다 돌아와야 하였다.

강희제 이후, 황제가 성묘를 겸해 순행하다가 심양을 방문하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조선도 문안사를 본격적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청의 옛 도읍인 심양에는 청 태조누르하치의 복릉(福陵)과 청 태종홍타이지의 소릉(昭陵)이 있었다. 청 측에서는 황제의 심양행을 자문(咨文, 외교문서의 일종)을 통하여 조선에 미리 알려 주었다(『정조실록』 7년 7월 7일). 문안사 역시 다른 사행과 마찬가지로 청 측의 동정을 상세히 파악하여 귀국 이후 왕에게 보고하였다(『숙종실록』 8년 3월 17일).

문안사행은 특수 목적을 가지고 산발적으로 파견되는 별행(別行)에 속하였으므로, 동지(冬至)와 정조(正朝: 음력 설날 파견),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에 파견)의 정기사행에 비하여 사신단의 규모도 간소하였다. 심양문안사의 정식 인원은 15~17명에 달하였는데, 정사(正使) 1명, 서장관(書狀官) 1명, 당상관(堂上官) 1~2명, 종사관(從事官) 3~4명, 청학 신체아(淸學新遞兒) 1명, 군관(軍官) 5명, 별견어의(別遣御醫) 1명, 만상군관(灣上軍官) 2명으로 구성되었다. 총 35명에 달하는 정기사행에 비하여 작은 규모였으며, 부사(副使)는 파견하지 않았다. 정사는 대신(大臣) 혹은 정1품의 왕실 종친이나 사위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서장관은 3~4품의 관원 중에서 선발하였다. 문안사는 황제의 안부를 묻는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소지하였고, 조선 토산물을 예물로 바치면 이를 능가하는 답례품을 받아 귀국하였다.

변천

1783년(정조 7)에는 심양문안사로 정사이복원(李福源), 부사오재순(吳載純), 서장관윤확(尹㬦)을 파견하였다. 이 사행은 건륭제의 생일도 겸하여 축하하는 성절경문안사(聖節兼問安使)의 명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부사도 파견된 경우였다. 심양문안사는 1829년(순조 29)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다. 다만, 1861년(철종 12)에는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인하여 열하(熱河)까지 피신한 함풍제(咸豊帝)를 위로하기 위하여 열하문안사를 파견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전해종, 『한중관계사연구』, 일조각, 1970.
  • 劉爲, 『淸代中朝使者往來硏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02.
  • 박영호, 「만오 박래겸의 《심사일기(瀋槎日記)》 연구」, 『동방한문학』 51, 동방한문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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