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사(神興寺)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된 강원도 설악산의 사찰.

개설

신흥사(神興寺)는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자장(慈藏) 율사(律師)가 향성사(香城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고 9층탑을 조성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으며, 인근에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701년에 의상 대사가 능인암 터에 향성사를 옮겨 지어 선정사(禪定寺)라고 고쳐 불렀다. 1644년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慧元) 세 승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신흥사(神興寺)라고 고쳐 불렀다. 1801년(순조 1)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본궁이었던 용동궁(龍洞宮)에 소속되어 용선전(龍船殿)을 건립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설악산 신흥사는 652년(신라 진덕여왕 6) 자장(慈藏) 율사(律師)가 향성사(香城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고 9층석탑을 조성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의 여러 기록에서는 신흥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자장 율사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1750년에 기록된 「설악산신흥사대법당중창기(雪嶽山神興寺大法堂重創記)」와 1761년에 용암체조(龍岩體照)가 쓴 「설악산신흥사대법당석체기(雪嶽山神興寺大法堂石砌記)」에 의하면, 원효와 의상이 보타산에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한 후 계곡을 따라 30리 쯤 떨어진 곳의 천후봉(天吼峰) 아래에 터를 잡고 선정사(禪定寺)라고 이름 붙였고, 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에 동산(洞山)·각지(覺智)·봉정(鳳頂) 세 승려가 선정사에 주석하였다. 그 후 사찰이 쇠락하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는데, 1644년(인조 22)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慧元) 세 승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신흥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신흥사라고 이름 붙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신흥사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수천척 높이의 미륵봉이 있고, 또 만길 낭떠러지 암석 아래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비발라굴(毘鉢羅窟)이라 칭하는 곳이 있는데, 이는 가섭(迦葉) 존자(尊者)가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옥발우(碧玉鉢盂)를 가지고 비발라굴에서 미륵불을 기다리는 형세와 같아서 신흥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즉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곳이 설산(雪山)이어서 설악과 이름이 같고 가섭 존자가 미륵불을 기다리는 형세와 같으므로, 미륵불이 흥기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신흥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향성사지(香城寺址) 3층석탑이 신흥사 가는 길에 현존하고, 1928년에 만해한용운이 편찬한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及乾鳳寺本末事蹟)』의 「신흥사사적(神興寺史蹟)」에 자장 율사가 향성사를 창건하고 9층탑을 조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향성사지는 신흥사의 옛 가람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신흥사사적」에 따르면, 자장 율사가 652년(신라 진덕여왕 6)에 향성사를 창건하면서 9층석탑을 조성하여 불사리를 봉안하고 계조암과 능인암을 창건했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에 화재가 일어나 향성사와 능인암이 불탔다. 그 후 의상 대사가 701년(신라 효소왕 10)에 능인암 터에 옮겨 중건하고 선정사라고 절 이름을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선정사에 관한 기록이 없고, 임진왜란 때 9층탑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인도고승금부불골(印度高僧今付佛骨)」에서 우리나라에 아육왕탑이 있는 곳으로 계룡산 갑사, 두륜산 대흥사, 장흥군의 천관산, 신천군의 구월산, 영암군의 월출산, 청도군의 운문사, 인제군의 설악산 신흥사의 서대 등을 들며 모두 아육왕탑이 있어서 숨었다가 나타날 때마다 서기를 방광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신흥사에 있던 9층탑은 아육왕탑으로 여겨졌던 것을 알 수 있다.

(2) 조선시대

신흥사는 조선전기 허응보우(虛應普雨)가 출가한 사찰로 알려진 것 외에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숙종대부터 다시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81년(숙종 7) 5월에 일어난 지진으로 신흥사도 크게 파괴되었던 것 같다.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나 우레 같은 소리가 나고 담 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襄陽)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 신흥사와 계조굴의 큰 바위가 모두 무너졌을 정도였다(『숙종실록』 7년 5월 11일).

그 후 신흥사는 크고 작은 전각들이 중건되었는데, 1788년에 해장전(海藏殿)이 중건되고 대종(大鍾)이 주조되었으며, 1798년에 명부전이 향서(向西), 월암(月庵), 낭월(朗月) 등에 의해 중건되었다. 한편 1803년에 부총(富摠)이 쓴 「용선전기(龍船殿記)」에 의하면, 신흥사는 옛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모신 원당(願堂)이었다고 한다. 1774년에 쓴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기일이 적혀 있는 국기일(國忌日) 현판이 현재 신흥사에 소장되어 있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현판에는 태조로부터 영조에 이르기까지 임금과 왕비의 기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영조는 1776년에 승하하였기 때문에 현판은 그 후에 새겼을 것이다.

용선전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본궁이었던 용동궁(龍洞宮)에 소속되어 1801년(순조 1)에 건립되었다. 용선전의 건립을 위해 벽파거관(碧波巨寬)이 직접 서울 왕실에 가서 신흥사가 예로부터 열성조의 원당이었음을 알리고 건립을 허락받았다. 그 후 1802년에는 왕실로부터 백미(白米) 80석, 전(錢) 500냥, 백목(白木) 2동, 포 1동, 백지(白紙) 300동 등의 하사품을 받고, 6월에 대상재(大祥齋)를 7일 밤낮 동안 설행하였다. 이로부터 신흥사에서는 매년 6월 28일에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기신대제(忌辰大祭)를 지냈고, 9월 22일에는 살아 있는 왕과 왕비의 축복을 기원하는 탄신불공(誕辰佛供)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1909년에 용선전이 무너졌다.

(3) 근현대

일제강점기 신흥사는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된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사찰령과 30본말사법을 제정하여 전국의 사찰을 30본사 아래에 소속되도록 정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신흥사도 건봉사의 관리 감독을 받았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본사(本寺)였던 건봉사가 전부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에 고암상언(古庵祥彦)과 정호성준(晶湖聲準)이 앞장서 신흥사를 대한불교조계종의 본사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1975년에 제3교구 본사로 승격되었다. 이후 1995년에 신흥사의 ‘신(神)’ 자를 ‘신(新)’으로 바꾸어 현재는 신흥사(新興寺)로 표기하고 있다.

(4) 성보문화재

신흥사의 성보문화재로는 극락보전, 보제루, 명부전,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불(보물 1721호),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불(보물 1749호), 향성사지 삼층석탑(보물 443호), 순조(純祖)가 하사한 청동 시루, 1987년에 착공하여 1994년에 완공한 통일대불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오경후·지미령, 『설악산 신흥사』, 활불교문화단, 2012.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국학문헌연구소,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 아세아문화사, 1977.
  • 박종묵(지상), 「설악산 신흥사 불상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