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보(新安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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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갑산군에 설치한 군사시설 진보.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여러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신안보가 소속돼 있는 갑산군(甲山郡)은 본래 허천부(虛川府)였는데, 조선초기에는 호인(胡人)들에게 점거되어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고려시대에 갑산만호부였던 것이 조선에 와서 1413년(태종 13)에 갑산군으로 고쳐졌다. 신안보는 갑산군에서 북쪽으로 압록강 인근에 설치되어 외적을 감시하고 연락을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갑산군의 북쪽으로 110리(약 43.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신안보는 지금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따르면 신안보는 갑산군 북쪽으로 압록강 앞에 있는 혜산(惠山)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는 혜산 오른쪽 다섯 진보가 모두 혁파되어 터만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땅이 압록강 밖에 있으며 본래 우리나라 땅이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신안보는 갑산군 북쪽 압록강 건너편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안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순(巡)·병영(兵營)―주진관(主鎭管)·독진(獨鎭)―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여기에 지휘체계가 미치기 어렵거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에는 추가적으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평안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독진(獨鎭)이 많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적의 침입 경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압록강 변을 모두 독립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진보는 평안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와 파수를 관리하였다.

갑산군에는 진보보다 작은 규모인 혜산구자(惠山口子)와 가사동구자(家舍洞口子)가 동서 지역에 설치되어 압록강 변을 방어하였다. 신안보는 압록강 건너편 북쪽에서 조선인 거주 지역을 보호하고 군사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및 현황

1516년(중종 11) 『조선왕조실록』에 한 차례 등장하는 지명이다. 평안도관찰사안윤덕(安潤德)은 장계를 올려 탕참천호(湯站千戶)이능(李能) 등이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들이 군사를 나누어 들어와서 신안보의 군민 30여 명과 애양보(靉陽堡)의 군민 1백여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고 보고한 사실을 전하였다. 안윤덕은 그들이 또 탕참(湯站) 지방을 침입하려 하니, 만약 적변(賊變)이 생기면 와서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중종실록』 11년 8월 29일). 이 기사를 통해 볼 때 신안보는 조선초기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함경도 진보 편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이전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천기(朝天記)』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