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방구비(神方仇非)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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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방구비 |
한글표제 | 신방구비 |
한자표제 | 神方仇非 |
상위어 | 방어영(防禦營), 병영(兵營), 진(鎭) |
관련어 | 진보(鎭堡)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관련 인물 | 권중개(權仲愷)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방구비(神方仇非)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12년 3월 8일, 『연산군일기』 6년 11월 3일, 『연산군일기』 7년 윤7월 8일 |
조선시대 함경도 삼수군에 설치한 군사시설 보(堡).
개설
함경도는 조선초기부터 진보를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지역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신방구비가 소속돼 있는 삼수군(三水郡)은 조선초기 본래 갑산군(甲山郡)의 삼수보였는데, 만호를 두어 방어를 담당하게 하고 있었다. 1446년(세종 28) 삼수보가 적의 침입 경로에 요해처가 된다고 하여 군을 설치하고 함흥부(咸興府)의 관할로 삼았다. 지군사(知郡事) 1인이 배속되어 함흥도우익병마(咸興道右翼兵馬)를 겸하였다. 신방구비는 삼수군 남쪽 내지에 설치되어 교통로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삼수군 중심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하였다. 삼수군에서 별해진(別害鎭)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으며, 강계부에서 삼수군을 가려면 별해진을 지나 신방구비를 거쳐야 했다. 그만큼 신방구비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어면(魚面)·신방구비(神方仇非)·별해(別害) 등 인근 세 보(堡)는 도로가 험하여 방어를 나간 군사들의 말이 으레 10이면 7~8마리는 죽는다고 할 정도로 매우 험한 지형이었다(『중종실록』 12년 3월 8일). 그럼에도 삼수군을 통해 대규모 적이 침입하였을 경우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방구비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신방구비의 역할은 중요했다. 신방구비는 내려오는 적을 차단하고 소식을 빠르게 상급기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500년(연산군 6)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신방구비는 삼수군 지방의 어면과 함께 성보를 설치하였다. 함경도 경차관 고형산(高荊山)과 남도절도사권중개(權仲愷)에게 연산군은 삼수군 두 지역에 성보를 설치한 것은 적군을 방어하기 편리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11월 3일). 이로 보아 신방구비는 연산군 재위 기간 중에 설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방구비는 경유하는 길이 매우 높고 험준하므로 남쪽 고을 군병들이 왕래하기가 곤란하여 폐해가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후주(厚州) 지역에 성보를 설치하여 적군을 제압한다면 신방구비는 혁파해도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듬해인 1501년(연산군 7) 좌의정성준(成俊)과 우의정이극균(李克均)이 별해와 신방구비 등지는 모두 요충지이기 때문에 성을 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함흥 이남의 백성은 금년에 별해에 성을 쌓게 하고, 함흥 이북 백성은 내년에 신방구비에 성을 쌓도록 할 것을 제안하면서 성을 축조하였다(『연산군일기』 7년 윤7월 8일). 신방구비는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후기까지도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형태
1502년(연산군 8)에 석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250척(약 379m)에, 높이가 8척(약 2.4m)이며,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1520년(중종 15)부터 만호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 육진지역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고승희, 「함경도 내지 진보의 변화」,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노영구, 「조선후기 함경남도 간선 방어체계」, 『한국문화』36,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