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녕현(新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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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신녕현(新寧縣)은 신라의 사정화현(史丁火縣)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신녕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신녕현이었으며, 경주(慶州)의 속현(屬縣)으로 편성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처음으로 파견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을 뿐 신녕현은 그대로 이어졌다. 신녕현은 1417년(태종 17)에 읍치와 관아를 장수역(長壽驛: 현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일대)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신녕현은 1497년(연산군 3)에 폐지되었다가 1503년(연산군 9)에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신녕군이 되었으나, 1914년에 영천군(永川郡)에 합병되었다. 조선시대에 신녕현은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신녕현은 신라의 사정화현에서 기원한다. 신라 경덕왕 때 신녕현으로 개명하였고,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주의 소속이 되었다가 1390년에 감무가 처음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신녕현은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1417년에는 읍치를 장수역의 땅으로 이전하였다(『태종실록』 17년 4월 8일).

조직 및 역할

신녕현은 신라 경덕왕 때 9주 중 양주(良州) 관할하에 있던 임고군(臨皐郡: 현 경상북도 영천시 시가지 일대)의 영현(領縣)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신녕현에는 지방관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신녕현은 경주의 소속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신녕현에는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고려말기인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신녕현에는 지방관인 감무가 처음으로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단 1413년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신녕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신녕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신녕에는 6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31명, 지인(知印) 15명, 사령(使令) 13명, 관노(官奴) 17명, 관비(官婢) 13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신녕에는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신녕현의 읍치와 관아는 원래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선천리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나, 1417년에 읍치 이전과 함께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산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변천

1497년(연산군 3)에 신녕현감길수(吉脩)의 폭정으로 인하여 고을 향리들이 도망친 것 때문에 신녕현은 폐지되고 그 영역은 이웃한 영천(永川), 의성(義城), 하양(河陽), 의흥(義興) 등에 나누어 소속되었다(『연산군일기』 2년 윤3월 22일). 1503년(연산군 9)에 신녕현이 복구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신녕군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신녕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신녕군은 영천군에 합병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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