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현(新溪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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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동북부에 있으며 동쪽으로 강원도 이천, 남쪽으로 평산과 금천, 서쪽으로 서흥, 북쪽으로 수안·곡산과 접한 곳에 설치되어 주민들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신계현(新溪縣)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 지역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고려시대에 신은현(新恩縣)과 협계현(俠溪縣)을 합하여 신계현이 되었으며, 이후 조선말까지 읍격의 승강이나 강역의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삼국시대 초에는 백제의 영토로 사소올(沙所兀)과 매차홀(買且忽)이 있었다. 4세기 중반 이후 매차홀이 고구려 영토가 되어 375년(고구려 소수림왕 5)에 수곡성(水谷城)이 세워졌으며, 390년(고구려 광개토왕 3)에는 사소올도 고구려 영토가 되었다. 수곡성은 통일신라시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현이 되었으며, 사소올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신은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수곡현은 협계현으로 바뀌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 이후 신은현과 협계현 모두 곡주(谷州)의 속현이 되었다. 신은현과 협계현은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모두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경기우도에 속하였으나(『태조실록』 3년 6월 23일), 곧 황해도로 이속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신은현과 협계현을 합하여 신은현이 세워졌다(『태조실록』 5년 9월 28일). 두 현을 합하여 하나의 현을 세울 때에는 원래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 따서 새로운 읍의 명칭을 정하는 예에 따라 1445년(세종 27)부터 신계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세종실록』 27년 9월 17일).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5품 현령이었다. 시위군 136명, 영진군 64명, 선군 110명이 속하였다. 1544년(세조 1)에 진관 체제 시행으로 황해도 수안도(遂安道)의 좌익이 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변천

1895년(고종 32)에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개성부 신계군이 되었고, 이듬해에 전국을 13도로 나누자 다시 황해도 신계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황해도(黃海道) 신계현(新溪縣)
  • 『여지도서(輿地圖書)』황해도(黃海道) 신계(新溪)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