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辰刻)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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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각 |
한글표제 | 신각 |
한자표제 | 辰刻 |
관련어 | 12지(支), 100각(刻) |
분야 | 문화/과학/천문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영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각(辰刻) |
하루를 12등분한 신(辰)과 100등분한 각(刻)으로 나타내는 시각법(時刻法).
개설 및 내용
고대에는 하루를 시(時)로 나누는 방법과 각(刻)으로 나누는 방법을 함께 사용하였다. 신각(辰刻)은 하루를 12시(時)로 나누어 자(子)·축(丑)·인(寅)·묘(卯) 등 12지(支)의 이름을 붙여 12신(辰)으로 정하고, 또 하루를 100등분하여 100각(刻)으로 나타내는 시각법을 말한다. 12시에 12지의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것을 12지시법(支時法)이라고 하는데, 대개는 이보다 더 자세한 24시법을 사용하였다. 24시법은 12시의 매시(每時) 두 시간을 초시(初時)와 정시(正時)로 나눈 것이다. 표 1은 12지의 이름을 붙인 12시와 24시, 그리고 오늘날의 시의 관계를 나타낸다.
신각의 방법으로 하루 12시를 12신과 100각, 그리고 10,000분(分)으로 나타낼 때, 신과 각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1일(日) = 12신 = 100각 = 10,000분
1신(辰) = 8⅓각
1각(刻) = 100분
변천
하루의 시간을 나누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고대에는 하루를 크게 낮과 밤으로 구분하되,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을 달리 나누었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때는 낮을 7단계, 밤을 1단계로 하여 하루를 8단계로 나누었고, 조갑(祖甲) 때는 하루를 10단계로 나누는 10시간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주(周)나라 때는 낮을 7단계, 밤을 5단계로 구분하였으며, 춘추전국(春秋戰國) 때는 하루를 다시 10단계로 나누어 낮과 밤을 각각 5단계로 나누는 제도가 있었다. 그 뒤 한(漢)나라 때 『태초력(太初曆)』이 제정되어 12신을 12시의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비로소 하루의 시는 일정한 시간 간격을 의미하게 되었다.
각법(刻法)은 시법(時法)보다 하루를 더 세밀하게 나누는 방법으로, 누각(漏刻)의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은나라 후기에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기 시작한 이후,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100각제가 사용되었다. 한나라 때는 100각제와 12시간제를 병행해서 사용하였는데, 밤의 시간은 오경(五更)의 제도를 따랐다. 그런데 100각은 12의 정수배(整數倍)가 아니므로 양자를 적절히 배합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전한(前漢) 애제(哀帝) 때는 잠시 120각제를 사용하였으나 곧 100각제로 바꾸었으며, 왕망(王莽)이 황제가 된 기원전 9년에서 기원후 23년 사이에도 120각제가 사용되었으나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다시 100각제로 환원되었다. 중국에서 100각제는 명(明)나라 말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청(淸)나라 때에 이르러 96각제로 바뀌었다.
한편 고대의 시각 제도는 역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하루를 시(時)와 각(刻), 분(分)으로 나누는 방법은 역법마다 차이가 있었다. 당(唐)나라의 『선명력(宣明曆)』과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그리고 청나라의 『시헌력(時憲曆)』을 예로 들어 12시 100각제와 12시 96각제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유경로·이은성·현정준 역주, 『세종장헌대왕실록』 「칠정산내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3.
- 이은희, 『칠정산내편의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 이은희·문중양 역주, 『국조역상고』, 소명출판사, 2005.
- 華同旭, 『中國漏刻』, 安微科學技術出版社(安微),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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