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현(始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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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시흥현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시흥현(始興縣)은 조선시대 정조 때 정해진 이름으로 조선이 개창한 이래 정조 이전까지는 금천(衿川)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본래 고구려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고려 초에 금주(衿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때인 995년(고려 성종 14)에 지방관으로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고려 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수주(樹州: 현 인천 부평)에 소속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 1394년(태조 3)에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눌 때 좌도에 속하였고, 1413년(태종 13)에는 고을 이름을 금천현(衿川縣)으로 바꾸고 현감이 관할하도록 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감을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읍호(邑號)를 시흥(始興)으로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에 인천부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시흥현은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파견하였다. 이후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비로소 읍호를 시흥으로 바꾸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과천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라고 하였다가 같은 해 윤9월에 복구되었다. 또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가 1년 만에 폐지되어 다시 시흥현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초기 금천현에는 종6품의 현감(縣監)과 종9품의 훈도(訓導) 각 1명이 있었다. 훈도는 지방 향교의 교생을 지도하기 위해 생원·진사 중에서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후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조선후기에 발간된 『여지도서』를 통해 금천현의 조직구성을 보면, 현감 아래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5명, 아전 22명을 두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현에는 2명을 두었고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다.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 등의 6방 업무를 담당하였다.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에는 시흥현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된 변화상이 담겨 있다.

변천

시흥현은 조선이 건국한 후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과천을 병합하여 금과(衿果)라고 하였다가 같은 해 윤9월에 복구하였다. 또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衿陽)이라 하였다가 1년 만에 폐지하였으며, 1416년(태종 16)에 다시 금천으로 명칭을 고쳐서 현감을 두었다. 세조 때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곧 다시 복구하였다. 1593년(선조 26)에 금천을 과천에 소속시켰다. 이후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를 시흥으로 바꾸었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1일). 시흥현을 현감에서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고을 명칭도 바꾼 것은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수원에 조성한 후 능행(陵幸) 행차를 위한 일련의 조치와 연관되어 있다. 1794년(정조 19)에 왕의 능행을 위하여 시흥에 행궁을 설치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흥현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전국이 23개 부 337개 군으로 바뀔 때 인천부 시흥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듬해에 23부제가 폐지됨에 따라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기(京畿) 금천현(衿川縣)
  • 『여지도서(輿地圖書)』경기도(京畿道) 금천(衿川)
  • 『대전회통(大典會通)』
  • 차문섭,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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