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후(豕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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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머리를 그려 넣은 과녁.

개설

화살을 쏘기 위하여 포목(布木)을 세우고 그 안에 짐승의 머리를 그려서 만든 표적을 포후(布侯)라고 하였다. 일명 사포(射布) 또는 사후(射侯)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포후의 종류에는 왕이 쏘는 웅후(熊侯), 문무관(文武官)이 쏘는 미후(麋侯), 무과(武科)에서 쏘는 시후(豕侯)가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시후가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세종실록』 오례의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를 통해 1402년(태종 2)에 처음으로 무과를 시행하면서 시후를 시행한 것을 알 수 있다. 무과의 보사(步射)에서 원후(遠候)·중후(中候)·근후(近候)의 표적에 돼지 머리를 그려 넣었는데[『세종실록』 오례 군례서례 사기 웅후·미후·시후·과녁], 이는 『국조오례의』와 『경국대전』에서 명문화되었다. 이후 시후는 조선말까지 무과나 도시(都試)를 비롯한 각종 시취나 무예 연마 때에 목표물로 사용되었다.

형태

무과 전시에는 보사에 후(候) 세 개를 설치하였다. 첫째, 원후는 사단(射壇)에서 240보(步) 떨어졌으며, 청색 포 바탕에 높이와 너비가 1장(丈) 8척(尺)이다. 그 너비를 3등분하여 정곡(正鵠)이 그 1등분을 차지하는데, 정곡은 사방이 6척이다. 흰색을 칠한 가죽을 후의 복판에 붙이고, 돼지 머리를 그렸다. 후의 좌우로 서로 50보 떨어진 곳과, 후의 뒤로 50보에도 좌우로 70보 떨어진 곳에 기(旗)를 세워 표적(標的)을 삼았다. 화살이 먼 데 이른 것과 복판을 맞힌 것과 후에 미친 것을 취하였다. 둘째, 중후는 사단에서 180보 떨어졌으며, 청색 포 바탕에 높이와 너비가 1장 4척이고, 정곡은 사방이 4척 6촌이 넘는다. 셋째, 근후는 사단에서 80보 떨어졌으며, 흰색 가죽 바탕에 높이와 너비가 4척 6촌이다. 모두 돼지 머리를 그렸는데, 화살이 복판에 맞힌 것을 취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 임선빈·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전시의 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전기 무과연구」, 국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심승구, 「조선초기 무과제도」, 『북악사론』1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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