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당(時敏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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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동궁의 외당으로 세자가 공식적인 의례를 행할 때 사용한 건물.

개설

시민당(時敏堂)은 창경궁의 동궁으로 대표되는 건물이다. 창덕궁에 동궁을 건립한 시기는 1485년(성종 16)이었다. 이때에 왕이 건양문(建陽門) 밖에 나가 동궁의 터를 살펴보았다(『성종실록』 16년 2월 4일).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건양문은 창덕궁의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그 동쪽으로 시민당의 기단과 초석이 그려졌다. 건양문에서부터 시민당의 정문인 집영문(集英門)까지 창경궁의 동궁 건물이 위치한 곳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 수록된 숙종이 지은 「시민당명병소서(時敏堂銘幷小序)」에는 ‘시민당’의 당호가 갖는 의미를 기록하였다. 시민은 『서경(書經)』의 「설명(說命)」에서 때에 민첩하기를 힘쓴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세자가 배움에 있어 부지런하고 민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시민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며 두 궁궐의 남쪽 하단에 있다.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뒷마당이 펼쳐지는데, 커다란 사각형 연못이 있다. 정문은 집영문이다. 집영문 밖에는 춘방(春坊)과 규방(閨房)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시민당은 동궁의 외당으로 왕세자의 책봉례와 관례, 동뢰연 등의 행례가 이루어졌다. 1736년(영조 12)에 이루어진 왕세자 책봉 의례에서는,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머물다가 인정전(仁政殿)에 들어 왕세자 책봉에 대한 교명과 책함을 내려 세자 책봉을 선포하면, 정사와 부사가 교명과 책함을 받들고 시민당에 이르러 왕세자에게 전해 주었다(『영조실록』 12년 3월 15일). 현종과 숙종, 경종이 시민당에서 왕세자로 책봉되고 하례를 받았다.

왕세자가 사부와 빈객을 만나 회강례를 행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며, 세자가 백관과의 상견례를 행하거나 동궁의 관원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곳이기도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왕은 동궁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는데, 이때 시민당을 청정과 조참의 장소로 정하였다. 세종대에 동궁의 대리청정을 위하여 경복궁의 계조당(繼照堂)을 조당(朝堂)으로 건립하였는데, 시민당을 이와 같이 활용한 것이다(『숙종실록』 43년 7월 25일).

왕세자의 자리가 비어 동궁으로 활용되지 않을 때에는 신주를 봉안하거나, 종묘에 부묘되기 전까지 혼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에 숙종의 국상이 있었을 때에 숙종의 혼전을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기 위하여, 이미 문정전에 자리하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을 시민당에 옮겨 모시고, 문정전에 숙종의 혼전인 효녕전(孝寧殿)을 모셨다.

변천 및 현황

창덕궁의 동궁은 1485년에 시민당, 낙선당(樂善堂), 저승전(儲承殿)으로 건립되었다. 저승전은 정침의 형태를 갖추었고, 낙선당은 내당, 시민당은 외당으로서 격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1756년(영조 32)에 낙선당이 소실되고, 1764년(영조 40)에 저승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7월에 시민당까지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시민당을 건립하지 않고, 1780년(정조 6)에 희정당(熙政堂) 동남쪽에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여 새로운 동궁으로 이용하였다.

형태

순조 연간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시민당의 초석과 기단만 있다.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동향으로 배치되었다는 것과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1663년(현종 4)에 그려진 「시민당야대지도(詩敏堂夜對之圖)」에 묘사된 시민당은 정면 3칸에 팔작지붕을 갖춘 건물이다. 또 3칸 건물에서 동쪽 1칸에 야대(夜對)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동쪽에 온돌방이 있는 비대칭 평면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1670년(현종 11)에 그려진 「시민당도(詩敏堂圖)」에서도 정면 3칸에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시민당도(詩敏堂圖)」「시민당야대지도(詩敏堂夜對之圖)」
  •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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