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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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시경 |
한글표제 | 시경 |
한자표제 | 詩經 |
분야 | 철학/유교/문학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 |
집필자 | 성낙수 |
간행년일 | 1429년(세종 11) |
권책수 | 주자소 |
사용활자 | 8권 4책 |
소장처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시경(詩經)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太宗實錄)』4년 10월 7일 |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이자, 동아시아 시가문학의 원조.
개설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총집이자, 동아시아 시가문학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데, 총 305편의 시편이 들어 있다. 서주(西周) 초기인 기원전 1100년 무렵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기인 기원전 600년 무렵까지의 약 500년 사이에 창작된 민간가요와 사대부들의 작품, 그리고 왕실의 연회ㆍ의식, 종묘에서 제사지낼 때 불렀던 노래의 가사들이다. 각 시편의 작가는 확실하게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계층도 각기 다르며, 시편의 제목은 시구 가운데 한 단어를 골라 매겼다.
공자가 『시경』 공부를 학업의 맨 처음 단계로 생각하면서 이후 학문의 필수 과목이 되었다. 현재 전하는 305편의 시는 공자가 교화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다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3천 여 수 가운데서 십분의 일로 추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 이후 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시편의 정리와 해석을 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漢)나라 유학자들이 『시경』을 정리한 교재들과 시편을 해석한 내용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보는 『시경』이다. 조선시대에도 학문의 필독서였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운영할 때에도 자주 인용되었다.
서지 사항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에 전국(戰國) 시대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초(楚)나라 죽간(竹簡)인 ‘초죽(楚竹)’에서 『시경』의 오래된 자료가 발견되어 현재 중국 상하이[上海]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이 진품이라면 『시경』의 원문으로 가장 오래된 것인 셈이지만, 내용은 이제까지 알려진 『시경』과 큰 차이가 없다.
구성/내용
공자는 『시경』을 학업의 첫 단계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논어』에 잘 드러나느데, 「양화(陽貨)」편에 보면,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였는가?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 하고 있는 것과 같아 학업이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시경』이 학업의 필수 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시경』은 주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를 채집한 ‘국풍’과 통치자들이나 그들을 위해 복무하던 지배층 문인(文人)에 의해 지어진 시들인 ‘아(雅)’,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경』은 15국의 「국풍(國風)」과 「소아(小雅)」ㆍ「대아(大雅)」 및 「송(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학자들은 '풍(風)'자를 ‘풍자(諷刺)’ 또는 ‘풍유(諷諭)’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풍(風)’이란 ‘풍자’와 ‘풍화(風化)’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민간의 노래가 채시지관(採詩之官)에 의해 수집되어, 조정에서 악사(樂師)가 불렀던 것을 일컫는다. 과거의 학자들은 ‘풍’에 ‘정풍(正風)’과 ‘변풍(變風)’이 있다고 보았다. 정풍은 왕의 교화와 어진 이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백성을 교화하는 것으로, ‘주남’과 ‘소남’이 여기에 해당한다. ‘변풍’은 왕도가 쇠하여 성현의 훌륭한 행실이 실현되지 않게 되자, 이들의 잘못된 처신 등을 노래하여 바른 법도를 회복하고자 풍자적인 의도로 노래한 것으로 ‘패ㆍ용ㆍ위’ 이하 13개의 ‘풍’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민간가요라는 뜻인 풍요(風謠)로 풀이한다. ‘풍’자에 ‘국(國)’자를 덧붙여 「국풍(國風)」이라 한 것은 전국 시대 말엽부터인 듯하다. 더구나 ‘주남’과 ‘소남’은 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의 작품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까지의 작품인 듯하다.
‘아(雅)’는 ‘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글자인데, 주로 왕정의 흥망성쇠를 노래한 것으로 「소아」와 「대아」가 있다. 소아와 대아는 주나라 때 사대부들이 지은 것으로, 서주의 수도 호경(鎬京)[오늘날의 서안]과 동주(東周)의 수도였던 낙읍(洛邑)[오늘날의 낙양]에서 이루어졌다. 소아는 대부분 주나라 왕실이 쇠퇴하고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배경 아래서 나온 것이라서, 현실 비판 및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한 시가 많다. 이에 비해 「대아」는 조회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축복과 훈계의 뜻을 담고 있다. 가창의 대상은 주로 천자, 군자, 가빈(嘉賓)과 같은 통치자들이었으며, 귀빈을 접대하고, 제후에게 상을 하사하며, 병사들을 위로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후직(后稷)과 무왕(武王), 선왕 등을 찬양하는 송가(頌歌) 혹은 주나라 왕실의 통치를 미화하는 것이 주류이다.
「송(頌)」은 ‘형용’ 또는 ‘모습’이라는 뜻의 ‘용(容)’과 통하며, ‘노래에 춤을 겸한다’는 뜻도 지닌다. 곧 송은 제사지낼 때 신을 찬양하거나 조상들의 은덕을 찬송하는 것이다. 주나라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시대에 조정의 교묘악가(郊廟樂歌)에서 비롯되었다. 「주송(周頌)」은 주나라 초기의 작품이다. 「노송(魯頌)」은 노(魯)나라 회공의 업적 등을 노래한 것이다. 「상송(商頌)」은 은(殷)나라 조상이 천명을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통치의 기초를 마련한 선왕(先王)에 대해 찬송한 것이다.
지금 일반인들이 주로 보는 『시경』은 한대(漢代)의 모형(毛亨)이라는 학자가 해석을 가한 ‘모시(毛詩)’이다.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이 ‘모시’에 주석을 하였고,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공영달(孔穎達) 등이 정현의 주에 다시 ‘소(疏)’를 달았다. 이보다 앞서 한나라 초기에는 신배공(申培公)과 원고생(轅固生) 및 한영(韓嬰)이라는 사람이 『시경』을 풀이하여, 당시의 글씨체인 금문(今文), 즉 예서(隸書)로 기록해서 전하였다. 이를 후세에 ‘삼가시(三家詩)’라 불렀는데, 지금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영향
『시경』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부터 지식 계층의 필독서였다. 경주 박물관에는 신라 청년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학업의 성취를 약속한 내용을 새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이 있는데, 이를 보면 신라 젊은이들에게 『시경』은 『상서(尙書)』ㆍ『예기(禮記)』ㆍ『춘추전(春秋傳)』과 함께 필독서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시경』은 곳곳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경복궁(景福宮)의 ‘경복’ 역시 『시경』에서 따온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태종실록(太宗實錄)』4년 10월 7일) 선조(宣祖) 때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뒤 이 전쟁에 대하여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면서 「대아」의 「소비(小毖)」편 가운데 “나는 앞서의 일에 데어서 후환을 경계하노라.”라고 한 구절에서 ‘징비’란 말을 따와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국을 찬미한 노래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역시 『시경』의 시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용비어천가』는 한글 가사와 한시(漢詩)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시는 『시경』의 시형식을 본받아 4언시체로 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려면, 『시경』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김주원, 「滿文 詩經의 飜譯 樣相 硏究」, 『알타이학보』19, 한국알타이학회, 2009.
- 안추잉 저·박종혁 역, 『시경의 사랑 노래―연애편』, 학고방, 2015.
- 윤인현, 「『논어』 에서의 『시경』 시」, 『국제어문』60, 국제어문학회, 2014.
- 조용희, 「영조 어제에 나타난 『시경(詩經)』 독서의 양상과 의미」, 『정신문화연구』36-4,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