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보(昇天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에 강화도 북쪽에 설치한 보.

개설

강화도 북쪽에 있는 승천(昇天)은 고려 예종대에는 해풍(海豐, 현 개풍)으로 불렸다. 동서남북이 모두 포구의 요새로서 적이 사방에서 침입할 수 있는 곳으로 국방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효종대 별장(別將)이 설치되었다가 1779년(정조 3)에 승천보의 별장을 승격시켜 첨사(僉使)로 만들고 겸하여 중군(中軍)을 통솔하게 했다.

위치 및 용도

승천보 인근의 승천포(昇天浦)는 물살이 느려서 뜻대로 배를 부릴 수 있었지만 진펄이 아니라 조수가 빠지면 배를 대기가 매우 어려웠다. 승천보의 서로(西路)로 왕래하는 중요한 나루는 철곶진(鐵串鎭)이었다. 승천보에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는 강의 입구가 광활해서 배를 쓸 수 있었으며 적이 침범하기 어려웠다. 승천보부터 초지수(草芝水)까지는 매우 좁아서 건너기 쉽고 또 물길이 전보다 크게 바뀌어 다 배를 댈 수 있었다. 정포(井浦)에서 인화(寅火)·철곶이를 거쳐 승천보 서쪽에 이르기까지 교동(喬桐)의 해로(海路)에 있다. 그 동북쪽은 곧 경강(京江)의 하류였다.

승천보는 철곶보의 동쪽과 교동의 상류에 위치하였으며, 서쪽으로는 황해와 잇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삼남지역의 조운로(漕運路)와 통해 있다. 1696년에 편찬된 『강도지』에는 “승천포의 근원은 봉두산(현 강화 봉천산)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고도 하였다. 동쪽은 경강의 하류이고, 조금 북쪽은 송도로 가는 큰 길목이었다. 사방이 모두 포구로 적군이 침입하기에 좋은 조건이어서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승천보가 설치되어 관방시설로 기능하였으며 한때는 강화와 개경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631년(인조 9)에 강화부의 창고에 쌓아둔 곡식이 거의 4만 석이나 되어 빌려주거나 받아들일 때에 백성들이 고역을 겪는다 하여 승천진(昇天津) 가에 창고를 하나 더 설치한 뒤 풍덕(豐德)과 교하(交河)의 백성으로 하여금 통진과 김포의 두 고을과 더불어 빌려주고 받아들이는 일을 같이 하도록 했다(『인조실록』 9년 1월 25일). 1779년(정조 3)에 승천보의 종9품 무관직인 별장을 승격시켜 종3품의 무관직인 첨사로 만들고 겸하여 중군(中軍)을 통솔하게 하고 전함을 비치해 변란에 대응하게 했다. 승천보의 별장은 강도에서 자벽(自辟)하는 자리였다. 그러므로 이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병조에서 임명하도록 했다(『정조실록』 3년 3월 8일).

형태

승천보에는 성이 설치되어 있었고, 부근에는 물을 저장하는 제방이 있어 여기에 물을 가두었다가 백성들이 논에 물을 대는 데 사용하였다. 광해군대에 제방을 헐고 논을 만들었다. 인조반정 초기에 다시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인조실록』 16년 3월 12일).

관련사건 및 일화

1866년(고종 3) 강화유수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영국 상인 오페르트([戴拔], Ernest Jacob Oppert)와 선주 젬스[詹仕]가 탄 배가 충청도 서산의 해미현(海美縣)을 통과해서 승천보에 왔는데, 바닷물이 얕아 앞바다에 물러가 있으면서 두 나라 간에 교역을 청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고서 몇 가지 바칠 물건이 있다면서 닭, 생선, 과일, 채소 등을 요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정역관(問情譯官)을 내려보내 물러가라고 달래고, 식량과 반찬 등을 후하게 주어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대우하는 뜻을 보여 주기도 했다(『고종실록』 3년 7월 1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