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인문(崇仁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시대 개경 나성의 동대문.

개설

개경의 나성(羅城)은 1009년(고려 목종 12) 3월에 강감찬(姜邯贊)이 개경 외곽에 외성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건립되었다. 나성의 완공은 21년 만인 1029년(고려 현종 20) 8월에 이루어졌다. 나성에는 사방에 4개의 대문을 설치했고, 중간에 8개의 성문과 13개의 소문을 두어 총 25개의 문을 설치했다. 사대문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리 불렸다. 동대문은 숭인문(崇仁門)으로 변화가 없었지만, 서대문은 선의문(宣義門) 또는 오정문(午正門), 남문은 회빈문(會賓門) 또는 비전문(碑篆門), 북문은 자안문(紫安門) 또는 북창문(北昌門)으로 불렸다. 개경 시내에는 동대문인 숭인문과 서대문인 선의문 사이에 개경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를 설치했다. 또 황성의 광화문(廣化門)부터 남대문인 회빈문까지는 남북대로를 설치했다. 이 2개의 대로가 교차하는 지역을 십자가(十字街)라고 한다. 광화문에서부터 십자가까지는 장랑(長廊)을 설치해 대시(大市)를 만들었는데 1,008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내용

숭인문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경우는 태조와 태종대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왕 또는 태상왕이 한양보다 개경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왕이 개경에 출입할 때 숭인문을 이용했다거나, 누구를 숭인문 앞에서 맞이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숭인문과 관련해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고려말 우왕 때 위화도회군과 관련한 것이다. 이성계(李成桂)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진격했는데, 당시 개경은 최영(崔瑩)이 지키고 있었다. 이성계는 군대를 둘로 나눠 개경으로 진입했다. 본인은 동문인 숭인문을 통해 진입했고, 좌군(左軍)은 선의문을 통해 진입하도록 했다. 결국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다

이상을 제외하고 『조선왕조실록』에 숭인문이 등장하는 경우는 대부분 목청전(穆淸殿)과 관련한 것이다. 목청전은 개경의 숭인문 안쪽 안정방(安定坊)에 있었다. 목청전이 위치한 곳은 태조의 잠저(潛邸)가 있던 곳인데, 1418년(태종 18)에 태종이 이곳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다[『세종실록』 지리지 구도 개성유후사]. 이런 까닭에 목청전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경우에는 숭인문이 같이 등장한다. 조선초에 계속 유지되던 목청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신하들이 계속적으로 복원을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다른 복구공사가 급한 것을 들어 실시하지 않았고, 영조는 태조의 어진을 또 다시 그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복구하지 않았다. 다만 1694년(숙종 20)에 이곳에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를 세웠다. 그러다가 1901년(광무 5)에 다시 목청전을 복구했다.

세조대에 숭인문과 관련해서 특이한 내용이 전한다. 당시 세자이던 예종이 세조에게 “병정(兵政)에 ‘숭인문’이란 말이 있는데, 경중(京中)에는 이런 문이 없습니다. 아마 잘못 인쇄한 듯합니다.”라고 고했다. 이에 세조가 내용을 확인하였더니, 정말로 한양의 동문인 흥인문(興仁門)을 잘못 적어 ‘숭인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세조실록』 6년 10월 10일). 이로써 당시 흥인문과 숭인문을 서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종실록』에는 숭인문이 3차례 등장한다. 모두 1452년(단종 즉위)의 기록이며 내용은 숭인문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흥인문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흥인문은 1451년(문종 1)부터 이미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1453년(단종 1)에도 아직 흥인문 공사가 완료되지 못했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숭인문은 흥인문의 오기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세조실록』과 『성종실록』에서도 잘못 기록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이 두 기록은 모두 한양의 풍수와 관련한 것들이다(『세조실록』 13년 6월 20일)(『성종실록』 16년 1월 8일). 『세조실록』에서는 한양의 곤방(坤方)이 낮고, 수구(水口)가 넓게 트여 숭인문과 흥례문(興禮門) 두 문 밖에다 못을 파서 물을 저장했다고 했다. 『성종실록』에서는 태조대에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숭례문(崇禮門) 밖에는 연못을 파고 숭인문 안에는 산을 만들었는데, 모두 도선(道詵)의 비보술(裨補術)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세조실록』의 숭인문은 흥인문, 흥례문은 숭례문을 잘못 기록한 것이고, 『성종실록』의 숭인문 역시 흥인문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연산군일기』에도 숭인문이 2차례 등장하는데 역시 흥인문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도경(高麗圖經)』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