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문(崇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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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서측 궁장에 설치된 궁문.

개설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에 인왕산 아래에 궁궐의 터를 잡고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어 경덕궁이라 불렸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을 처음 조성할 때 궁역을 둘러 궁장(宮墻)을 쌓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경희궁터는 동남쪽이 지형이 낮고 서쪽으로 갈수로 지형이 높아진다.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동남쪽 모서리에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흥화문을 지나 서쪽으로 깊은 곳에 정전인 숭정전(崇政殿)이 위치하였다. 경희궁의 궁역을 경계하는 궁장에는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는데, 동쪽에는 흥원문(興元門)을 두었고,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을 두었으며,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을 내고,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을 설치하였다.

위치 및 용도

숭의문이 위치하는 경희궁의 서쪽은 궁궐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지형이 높아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궐내 각사는 경희궁의 남쪽과 동쪽에 배치되었으며, 숭의문 안쪽에는 서소(西所)가 있었다. 숭의문 밖에는 돈의문(敦義門)에서 창의문(彰義門)으로 이어지는 한양 성곽이 길게 늘어서 인왕산을 넘어간다.

변천 및 현황

숭의문은 경희궁이 궁궐의 역할을 잃고 전각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은 공허지가 되어 용동궁(龍洞宮),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과 함께 경작지로 분배되었다. 이때 경희궁의 건물들이 대거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1892년(고종 29)경에 그려진 「슈션젼도[首善全圖]」에는 경희궁의 궁장과 궁문(宮門)이 그대로 그려졌으나, 1911년에 제작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에는 경희궁의 경계가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아마도 이즈음에 궁장이 허물어지고 숭의문이 철거된 것으로 생각된다.

형태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맞배지붕으로 조성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77년(정조 1) 8월에 경희궁에서 여러 변고가 일어나 정조와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등 왕실 어른이 모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이때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각 궁문에 군사들을 배치하였는데, 경희궁의 숭의문과 창경궁의 홍화문에는 군사 100명을 배치하였다(『정조실록』 1년 8월 6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서궐도안(西闕圖案)」「슈션젼도(首善全圖)」
  •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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