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양문(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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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는 문.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경희궁의 흥정당(興政堂)은 선대 왕들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편전 건물이었다. 숭양문은 이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던 문이다.

위치 및 용도

숭양문은 흥정당의 동쪽 행각에 있는 문이다. 남쪽 행각에는 흥정당의 정문인 흥정문(興政門)이 있었고, 서쪽 행각에는 광명문(光明門)·금요문(金曜門) 등이 있었다. 경복궁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다(『고종실록』 4년 11월 8일). 경희궁과 경복궁의 숭양문은 모두 편전에 속한 문이다. 왕은 남쪽을 바라본다, 즉 ‘남면’한다는 상징과 ‘숭양(崇陽)’이 서로 통하는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변천 및 현황

숭양문은 1620년(광해군 12) 경희궁 창건 당시에 조성되었으나, 1829년(순조 29)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1831년(순조 31)에 복원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도성 안의 모든 궁궐이 어처구니없이 훼손되었으나 가장 처절하게 훼손이 일어난 것이 경희궁이었다. 흥정당이 광운사(光運寺)의 전각으로 팔려 나간 1928년 이전에 숭양문은 이미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에 이른다.

형태

경희궁의 숭양문은 흥정당의 동행각 북쪽 가장 끝에 놓였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의 도판이 명확하지 않은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솟을문에 맞배지붕을 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일성록』의 1765년(영조 41) 8월 28일 기사에 숭양문이 언급되었다. 영조가 탄신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왕세손을 대동하고 조정의 원로들이 모여 있는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갔다. 기로·대신 등 신하들을 입시하라 명하고 작은 연회를 베풀어 음식을 내리며 왕 자신도 술잔을 받았다.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이 앞으로 있을 탄신진하를 받으시라며 연이어 술을 청하니 곤혹스럽다며 마다했다. 환궁 길에 육상궁에 들렀고, 궁궐로 돌아와 흥정당 동문인 숭양문 밖에 이르렀을 때, 지금 자신의 나이 72세는 태조와 공자보다 1살이 적은 때로 추모하는 마음이 여느 때보다 배나 크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손이 보필한 기로소에서 나이든 군신이 모여 밥을 나누었으니 특별한 일이라 하며, 이 일을 후세에 전하고 싶다는 하교를 내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은대조례(銀臺條例)』「서궐도안(西闕圖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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