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권씨(淑儀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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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6대 임금인 단종(端宗)의 후궁. 본명은 권중비(權仲非)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판관(判官)을 지낸 권완(權完)이며, 어머니는 윤지정의 딸인 윤씨(尹氏)이다. 아버지인 권완이 단종의 복위 계획과 연루되었으므로, 공신의 비(婢)가 되었다가 방면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단종의 후궁

권숙의(權淑儀)는 아버지 권완(權完)과 윤지정의 딸인 어머니 윤씨(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좌의정정인지(鄭麟趾)를 비롯하여 우의정한확(韓確)과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補) 등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2년 1월 1일) 그리고 수양대군은 여러 종친 및 신하들과 함께 창덕궁(昌德宮)에서 처녀를 간택하였는데, 풍저창(豊儲倉) 부사(副使)송현수(宋玹壽)와 예원군사(預原郡事)김사우(金師禹), 전 사정(司正)권완(權完)의 딸 가운데 결정을 하기로 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8일) 이어 수양대군은 종친 및 신하들과 의논을 한 후, 단종에게 송현수의 딸을 비(妃)로 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을 잉(媵)으로 삼도록 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10일) 이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에 책봉하고, 김사우와 권완의 딸에게는 관교(官敎)를 내려주었다.(『단종실록』 2년 1월 22일)

그러나 단종은 아버지 문종(文宗)의 상이 끝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상중(喪中)에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다며 정지하도록 지시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23일) 그럼에도 수양대군은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주장하였고, 결국 단종은 당시 실권자이던 수양대군의 말에 따라 길복(吉服)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이에 효령대군과 호조 판서(判書)조혜(趙惠)는 단종의 왕비가 될 정순왕후(定順王后)는 효령대군의 집에서, 김사우의 딸인 김씨는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의 집에서, 권완의 딸인 권숙의는 대사헌권준(權蹲)의 집에서 봉영하여 궁으로 들어오게 하였다.(『단종실록』 2년 1월 24일)

계유정난과 단종복위 사건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皇甫 仁), 김종서(金宗瑞), 정분(鄭苯) 등을 죽였다. 그리고 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江華島)에 유배시키는 등 단종의 보필 세력을 제압한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455년(세조 1) 단종은 결국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

그런 가운데 1457년(세조 3) 세조는 권숙의의 아버지인 권완을 단종의 복위를 꾀한 죄로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세조실록』 3년 6월 21일)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세조실록』 3년 6월 21일) 그리고 권숙의의 아버지 권완은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해지고, 재산도 적몰(籍沒)당했다.(『세조실록』 3년 7월 15일) 권숙의 또한 비(婢)가 되어 영광(靈光)에 영속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조석문(曹錫文)의 계집종이 되었는데,(『세조실록』 3년 8월 21일) 1464년(세조 10)에 이르러 방면되었다.(『세조실록』 10년 4월 18일)

권숙의는 방면된 후 외방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1519년(중종 14)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진천(鎭川)에 사는 단종의 후궁 권씨(權氏)를 혜양(惠養)하도록 청하였고, 이에 중종은 예에 따라 혜양하라고 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14년 1월 26일)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단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