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사(修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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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가 개항 이후 1876년·1880년·1881년·1882년의 네 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 전권대신의 명칭.

개설

1876년(고종 13) 2월에 조선 정부가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조선이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부터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근대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 외교 사절단의 대표인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바로 수신사(修信使)였다. 개항 이전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가 통신사라면 수신사는 개항 이후 외국에 최초로 파견한 근대적 외교 사절이라고 평가된다. 수신사는 1876년·1880년(고종 17)·1881년(고종 18)·1882년(고종 19)에 걸쳐 모두 네 차례 파견되었다. 수신사 일행은 50∼70명 정도였으며 일본 체류 기간은 2~4개월이었다. 1876년 최초의 수신사는 김기수(金綺秀)였으며, 2차는 김홍집(金弘集)이었다. 수신사 일행은 일본의 수도와 개항장 등을 시찰하고 귀국 후에는 종합보고서를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고종과 고위 관료들은 수신사의 보고를 접한 뒤 외교 정책의 방향과 개혁 정책에 여러 부분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2월 22일 김기수를 1차 수신사로 임명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에서 사신을 파견해 우호를 다졌으므로 조선도 선린(善隣)의 뜻에서 전권사신(全權使臣)을 파견하여 신의를 강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의를 나타내는 사신의 칭호는 수신사로 정하였으며 응교(應敎)김기수를 임명하였다(『고종실록』 13년 2월 22일). 김기수는 수신(修信)이라는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하였던 우호는 개항 이전의 전통적인 교린 체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통적인 교린 체제의 회복 또는 연장으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전후에 벌어진 서계(書契) 사건 등을 통하여 조일 관계가 바뀌고 있음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개항 이전에 파견한 통신사 대신 수신사로 명칭을 바꾼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일본은 새로운 외교 체제의 성립을 강조하면서 수신사행의 절차나 구성을 통신사행과는 다르게 요구하였다.

제1차 수신사는 일본이 강화도조약에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한 회사(回謝)와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의 정세와 개화 상태를 살피는 임무였다. 김기수 일행은 4월 29일 부산포를 떠나 5월 7일 동경에 도착하였으며, 원료관(遠遼館)에 20여 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5월 27일에 동경을 출발해서 윤5월 7일에 부산포로 돌아왔다(『고종실록』 13년 윤5월 18일). 6월 1일에 김기수는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이 부국강병에 모든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선(電線)·화륜선(火輪船)·농기계 등을 일본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였다(『고종실록』 13년 6월 1일). 김기수의 보고서를 보면 그가 느낀 점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는 일본의 증기선 황룡환(黃龍丸)에 승선한 뒤에 연통을 단 증기선이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에 놀라워하였다. 요코하마에서 기차를 보고는 행랑채로 알았다가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에 목적지인 동경에 당도하여 당혹해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정치 개혁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천황의 통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군대의 모습에 호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김기수는 기존의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해서 일본인을 멸시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부국강병에 임하는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태도를 보여 수신사가 받은 영향을 알 수 있다. 이후 4차에 걸쳐 진행된 수신사 파견에서도 더욱더 일본의 근대화 정책에 호감을 가지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변천

1879년(고종 16) 3월 일본은 유구(琉球) 왕국을 폐지하고 오키나와[沖繩]현 설치를 단행하였다. 그 무렵 청과 러시아 사이에 이리(伊犁)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유원(李裕元)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이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고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조선 정부는 1880년 2월에 2차 수신사 파견을 결정하였고, 3월에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8월 28일에 귀국한 김홍집을 만났다. 고종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이리 문제로 전쟁에 돌입하는지의 사실 관계, 외국어학교의 설립, 지진과 화산, 정한론(征韓論)의 진행 상황, 행정 제도의 개편, 외교관의 해외 파견, 군대의 훈련과 경찰제도, 건축제도, 시장과 경제 상황, 의복 등 풍속의 변화, 유구국이 사라지고 현이 된 상황 등을 보고받았다(『고종실록』 17년 8월 28일).

김홍집의 제2차 수신사행은 변리공사(辨理公使)화방의질(花房義質) 등이 요구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화방의질은 인천 개항을 요구하였고, 미곡 금수의 해제와 관세 배상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김홍집 일행은 일본 정부의 권유로 개화 문물을 시찰하고, 일본 정계 요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청국공사관을 방문하여 공사하여장(何如璋)과 참찬관황준헌(黃遵憲) 등과 국제 정세를 논하였다. 김홍집은 이들과 여섯 차례에 걸친 만남을 통하여 문호 개방과 부국강병책의 절박함을 이해하였다. 특히 하여장의 지시로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저술해서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과 함께 전해 주어 조선의 정계는 물론 지방 유생에게까지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9월 8일에 고종은 재차 김홍집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책략』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고종과 관료들은 김홍집이 올린 『조선책략』을 보고 러시아가 두만강을 넘어 조선으로 남하할까 염려하게 되었고, 청나라가 조선을 미국과 연대시키려 한 의도에 빠지게 되었다(『고종실록』 17년 9월 8일).

김홍집의 2차 수신사 귀국 이후인 1880년 12월에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군기 제조와 군사훈련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였다. 일본에도 문물제도의 조사를 위하여 1881년 4월 조사(朝士) 시찰단을 보냈으며, 9월에는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또한 청나라의 권유에 따라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81년에는 제3차 수신사로 조병호(趙秉鎬), 1882년에는 제4차 수신사로 박영효(朴泳孝)를 파견하였다. 박영효가 수신사로 갈 때는 개화파였던 서광범이 동행하였다. 이처럼 개항 이후 진행된 개화 정책의 주요 근간은 수신사의 견문 보고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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