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진(水口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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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의주부에 속한 만호진.

개설

수구진은 평안도 의주부의 압록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세종대에 처음 만호(萬戶)를 두었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침략을 막는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중요도가 점차 낮아져 고종대에 혁파되었다.

위치 비정

현재 북한 평안북도 의주군 대화리에 위치한다.

자연 환경

동남쪽으로 수진천을 지나 의주군, 서쪽으로 가원봉을 경계로 삭주군과 나뉜다. 남쪽으로 천마산 줄기가 지나가고 있어 동쪽과 남쪽이 높고 서쪽과 북쪽은 고도가 낮아 압록강 연안은 저산성 구릉지대와 평야를 이룬다. 수구진의 바로 앞에 수구도가 있고, 그 맞은편은 중국이다.

변천 및 현황

1442년(세종 24) 1월에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이숙치(李叔畤)가 평안도 수비를 위해 압록강 연안에 19개의 만호를 추가로 설치하였다. 이때 수구진에 만호가 파견되었다(『세종실록』 24년 1월 17일). 이 지역에 방어시설을 강화한 것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점도 있지만, 압록강 중상류 이북에 위치한 건주여진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1433년과 1437년 두 차례에 걸쳐서 건주여진을 정벌하였고, 이후 조선과 이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은 압록강 연안에 수구진 등을 비롯한 여러 진보를 설치한 것이다.

특히, 1449년(세종 31)에 명 정통제(正統帝)가 오이라트의 에센[也先]에게 포로가 된 ‘토목보(土木堡)의 변’으로 요동 지역의 정세가 긴박하게 변화하였다. 조선은 김종서를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하는 등 이러한 추세를 예의 주시하였다. 이때 건주위의 이만주(李滿住) 등이 변경을 침입할 것이라는 첩보도 있었다. 문종은 즉각 수구진 등에 방어를 강화도록 하였다(『문종실록』 1년 8월 6일).

성종대에 이르면 건주여진이 압록강 연안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수구진의 맞은편 지역까지 왔다(『성종실록』 4년 6월 4일). 특히, 1490년(성종 21)에 만포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허곤이 건주여진 7명의 목을 베며 양자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후 건주여진은 창성, 창주 등을 공격하였다. 조선은 압록강 연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기존의 진보를 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1492년(성종 23)에 수구석보성(水口石堡城)을 쌓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구는 의주 방산진(方山鎭)의 진관에 포함되어 권관(權管)이 파견되었다.

이 지역은 중국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의 도적들이 압록강을 넘어와 재산을 빼앗아 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였다(『선조실록』 36년 6월 6일)(『광해군일기』 13년 6월 19일). 한편 17세기 초반 후금의 침략 가능성이 높아지며 수구를 비롯한 압록강 연안 진보의 중요성이 커지자 조선은 진보의 수축과 지휘체계의 정비, 군인의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정묘·병자호란으로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17세기 후반에 추진한 북벌과 군사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평안도의 방어체계를 꾸준히 정비하였다. 그러나 청과의 관계가 안정적으로 변하면서 강변 파수의 목적은 인삼 채취와 범월을 막기 위한 정도로 바뀌었다. 결국 1883년(고종 20) 4월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수구 등을 혁파하였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형태

1492년(성종 23)에 수구석보성(水口石堡城)을 쌓았는데, 높이 9척(약 2.7m)이고 둘레 970척(약 294m)이었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가 2,473척(약 749.4m)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1493년에 쌓았다고 하여 『성종실록』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일성록(日省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