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진(松坡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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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송파 부근에 있던 한강변의 나루.

개설

조선전기에는 송파 부근에 삼전도 나루터가 자리 잡고 있어서 송파나루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송파진(松坡津)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것은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인조대 이후이다. 숙종대에 이르면 도성 방어 체제가 강조되면서 한강의 나루도 이 체제 안으로 흡수되어 송파진은 수어청에서 관리하는 나루가 되었다. 송파진은 이후 창고의 설치와 장시의 개설로 단순한 나루를 넘어서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적 입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자연 환경

한강은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물류 이동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전국 각 지역의 세곡은 한강의 물길을 따라서 서울로 운반되었고 지방의 특산물과 생필품, 기호품 등이 수로와 육로를 따라 서울로 집적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다리를 건설하는 기술이 현재와 같지 않아서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을 서울로 운반하려면 반드시 한강을 건너야 했고 그래서 배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배는 아무 데나 댈 수 없었다. 물살이 세지 않거나 정박이 가능한 나루터가 존재해야 했다. 그래서 한강에는 여러 곳에 나루터가 생겨났다. 나루터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혹은 각종 물품을 운송하기 위하여 대기하는 장소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송파나루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전기 나루터는 1415년(태종 15)부터 외관직인 종9품의 도승(渡丞)을 책임자로 하여 배의 도선(導船)과 기찰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도승을 보좌하여 각 진도에는 진리(津吏)를 두어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실제 도강할 때에는 진척(津尺)이나 진부(津夫)를 두어 나룻배를 저어 갔다.

송파에는 삼전도(三田渡)가 자리 잡고 있었다. 1439년(세종 21) 병조에서 삼전도를 설치하여 한강을 도선하는 배 1척, 사재감선 2척을 두고 진척 10인을 배속시켰다. 이후 삼전도는 광주에서 태종이나 세종의 능으로 가는 능행로의 길목으로서 큰 나루로 발전하였다.

조선전기에 한강의 나루터는 양화진(楊花津), 노량진(露梁津), 한강진(漢江津), 삼전도(三田渡), 광진(廣津) 등 5진을 중심으로 형성 발전하였다. 도승(渡丞)이 파견되었던 이들 지역은 나루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가 되면 5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나루터가 동작진(銅雀津), 송파진(松坡津), 두모포(豆毛浦), 뚝섬(纛島), 망원정(望遠亭) 등으로 확산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역시 송파진이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의하면 한강에 있는 모든 선박은 공조(工曹)에서 매년 빠짐없이 조사하도록 하여 선박의 크기에 따라 자호(字號)를 선체에 낙인(烙印)하였고 선주(船主)의 이름도 등록하도록 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송파진은 수어청(守禦廳)에서 직접 관리하는 나루터가 되었다. 왜냐하면 남한산성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도성에서 남한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파진의 관리는 수어청 천총이 하도록 했으며, 송파진에는 군대 1초와 갑사둔(甲士屯)이 있어서 군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비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관련 기록

조선후기에 이르면 한강의 5대 나루터는 한강진 대신 송파진이 자리를 잡았다. 1664년(현종 5)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헌릉(獻陵) 행차에 관한 도로 사정을 말하면서 노량진으로 길을 택하게 되면 백성들의 전답에 피해를 입게 되므로 삼전도 쪽으로 길을 정하여 송파진을 건너게 되면 편리하다고 건의했다(『현종실록』 5년 2월 29일). 특히 숙종대 이후 수도 방위 체제가 형성되면서 한강의 나루터를 중앙 군영에서 담당하게 된 이후로 송파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1710년(숙종 36) 약방제조(藥房提調)민진후(閔鎭厚)는 삼전도를 총융청(摠戎廳)에서, 한강을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양화도를 어영청(御營廳)에서, 노량진을 금위영(禁衛營)에 소속시켜 여러 가지 일을 주관하도록 건의하였다. 그것은 일찍이 수어청에서 송파진을 관리하는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숙종실록』 36년 10월 4일). 즉 다른 나루와는 달리 송파진은 남한산성과 가까워 일찍이 수어청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던 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전통편(大典通編)』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 고동환, 『朝鮮後期 서울 商業發達史硏究』, 지식산업사, 1998.
  • 김종혁, 「조선전기 한강의 進度」, 『서울학연구』23,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4.
  • 정희선, 「한성부의 교통과 통신」, 『서울 2천년사-14 조선시대 한성부의 역할』,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3.
  • 최완기, 「朝鮮初期 漢江 津渡制의 整備와 運營」, 『사학연구』71, 한국사학회, 2003.
  • 최완기, 「漢江 津渡制와 楊花津」, 『교회사연구』2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3.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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