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례(送神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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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마치고 귀신을 다시 돌려보내는 의식.

개설

제사의 행사는 의식을 준비하는 절차, 귀신을 맞아들이는 절차, 맞아들인 귀신에게 참배하는 절차, 불러들인 귀신을 돌려보내고 의식을 마치는 절차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송신례(送神禮)는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의식이다. 송신례는 다시 세 가지 의식으로 나뉜다. 축판과 폐백을 태우는 망료(望燎) 혹은 땅에 묻는 망예(望瘞), 예식 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는 예필(禮畢), 신주판을 제자리에 모시는 납신(納神)이 그것이다. 종묘와 사직의 제례에서는 송신례가 진행되는 동안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세조 때 제사 음악을 정비하면서 한 차례 변화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송신례는 조선초기부터 제사 의식의 중요한 절차로 인식되었으나, 정작 『조선왕조실록』의 각종 의주(儀註)들과 『세종실록』 「오례」 및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조실록』에 기록된 종묘친향의주(宗廟親享儀註)와 환구제의주(圜丘祭儀註)를 통해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송신례는 망료 혹은 망예, 예필, 납신의 절차를 포괄하는 의식을 의미하였다(『세조실록』 10년 1월 14일)(『세조실록』 10년 1월 15일).

망료는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를 마친 뒤, 제사에 사용한 폐백과 축판을 태우는 의식이다. 망예는 지기(地祇)와 인신(人神)에 대한 제사를 마친 후 폐백과 축판을 땅에 묻는 의식인데, 제사 대상이 해(海)·독(瀆)·천(川) 등과 같이 물에 관련된 귀신일 경우에는 물에 담그기도 하였다. 이 같은 망료와 망예는 폐백과 축문을 실제 귀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행위였다.

예필은 예를 마쳤음을 공표하는 행위로, 예필이 선언되면 제사의 주재자가 예식 장소에서 퇴장하였다. 망료·망예와 예필은 경우에 따라 순서가 바뀌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예식의 주재자인 초헌관(初獻官)이 직접 망료나 망예를 행할 때는 망료·망예를 행한 뒤 예필하였고, 아헌관(亞獻官) 이하가 망료나 망예를 대행할 경우에는 예필을 먼저 시행하고 초헌관이 퇴장한 다음 망료·망예를 거행하였다. 단, 세조 때 환구제 의식 절차를 정비할 때는 중국의 고사를 들어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더라도 망료·망예는 아헌관이 대행하도록 함으로써 망료에 앞서 예필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납신은 신위판을 제자리에 봉안하는 절차를 말한다. 납신도 경우에 따라 망료·망예보다 먼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예컨대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달래는 여제(厲祭)의 경우 신위판을 봉안한 뒤 축판을 감(龕)에 묻었다.

이러한 송신례는 제사의 일반적인 절차로, 대부분 규정대로 행하여졌다. 다만 선농제 이후 친경(親耕)을 하는 경우에는 생략한 것으로 보이는데, 1739년(영조 15) 영조가 선농 친제 및 친경을 거행할 때 송신례를 행하지 않은 경우(『영조실록』 15년 1월 28일)가 여기에 해당한다.

변천

송신례의 절차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사용하는 음악은 세조 때 한 차례 정비가 이루어졌는데, 사시종묘향사(四時宗廟享祀)의 경우를 예로 들면 예필을 할 때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승안지곡(承安之曲)을 사용하게 하였으나, 『국조오례의』에서는 흥안지곡(興安之曲)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