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영(宋德榮)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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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덕영 |
한글표제 | 송덕영 |
한자표제 | 宋德榮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호 | 사정(四貞) |
봉작 | 연창군(延昌君) |
시호 | 충장(忠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627년(인조5) |
본관 | 연안(延安) |
부 | 송간(宋簡) |
자녀 | 송수(宋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덕영(宋德榮) |
총론
[?∼1627년(인조5) = ?].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무신. 자는 화숙(華叔), 호는 사정(四貞)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주거지도 황해도 연안이다. 선전관(宣傳官)송간(宋簡)의 아들이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수문장(守門將)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서북 지방으로 몽진(蒙塵)할 때 아버지 송간이 선전관으로 선조를 호종(扈從)하였으므로, 그도 의주(義州)까지 함께 따라갔다. 1593년(선조26) 선조가 서울로 환도(還都)하면서 영유(永柔)에서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호(萬戶)가 되었다.
1617년(광해군9) 중추부 첨지사오윤겸(吳允謙)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정사(正使)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 갔는데, 일본에서 주는 금(金)을 사양하다가 땅에 파묻고 돌아와서 화제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평안도 맹산현감(孟山縣監)으로 나갔다.
1624년(인조2) 공신(功臣) 책봉에 불만을 품은 평안도병마사이괄(李适)이 구성부사(龜城府使)한명련(韓明璉)과 함께 평안도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군(反軍)이 바로 남하하여 서울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아서 길마재[鞍峴]에 이르러,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의 중군(中軍)에 소속되었다. 안주목사(安州牧使)정충신(鄭忠信)의 전략에 따라서, 그는 친척 조카 이희건(李希建) 등과 협력하여 길마재 위에서 올라오는 반군을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 큰 전공을 세웠다. 송덕영이 승리를 보고하자, 도원수장만이 그에게 관서군(關西軍)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해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봉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 안주성 싸움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군사들이 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의주(義州)를 함락하고, 평안도의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고 남하하였다. 평안도병마사남이흥(南以興)은 황해도 안주(安州)에서 후금 군사의 침입로를 막으려고 여러 고을에 파발문을 보내어 안주로 집결하게 하고, 평안도 군영의 수영패(隨營牌) 3백 명을 인솔하고 급히 달려가서 안주성(安州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적의 선봉 부대는 이미 청천강을 건너서 안주성 아래까지 다가와 있었다. 병마사남이흥은 우후(虞侯)박명룡(朴命龍), 안주목사김준(金浚)과 함께 성을 지킬 계책을 세웠는데, 맹산현감송덕영을 비롯하여 전 강계부사(江界府使)이상안(李尙安)과 구성부사전상의(全尙毅), 개천군수(价川郡守)장돈(張暾), 영유현령(永柔縣令)송도남(宋圖南), 태천현감(泰川縣監)김양언(金良彦), 박천군수(博川郡守)윤혜(尹惠) 등도 각기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성에 들어왔다. 그때 송덕영은 이미 임기가 끝나서 안주성에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성안에 있는 군사와 백성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니, 노약자까지 합쳐서 수천 명이 채 못 되었으나, 후금의 군사는 기병으로 3만 6천 명이나 되었다. 적과 싸우기도 전에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주성을 보전하지 못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후금에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과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성 밖에서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남이흥은 “어찌 차마 너희들처럼 나라를 팔아먹고 구차하게 살겠는가?” 하고, 필사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후금 군사가 안주성을 포위한 다음에 공격하였는데, 첫날은 후금 군사가 싸우다 후퇴하였다. 다음날 아침 적들은 낮고 평탄한 성의 동쪽 모퉁이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서 우리 군사들을 흩어지게 한 다음에, 수만 명이 성 위로 기어올라 왔다. 전세가 기울자 병사남이흥과 부사김준 등이 화약에 불을 붙여 자결하려는데, 송덕영을 비롯하여 박명룡 · 이상안 · 전상의 · 장돈 · 김양언 · 송도남 · 윤혜 · 한덕문(韓德文) 등이 자원하여 화약이 터질 때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모두 황해도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류재집(四留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부상록(扶桑錄)』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낙서집(洛西集)』
- 『해사록(海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