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죽도지전(損竹島之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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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7년 2월 왜구가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속한 섬인 손죽도를 침략한 사건.

개설

1587년(선조 20) 일본 오도(五島)와 평호도(平戶島)의 왜구가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속한 손죽도를 침략하여 많은 조선인과 군선들을 납치해 갔다. 이 사건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최대의 외침으로 이후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 및 임진왜란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배경

을묘왜변 이후에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1573년 3월 왜구가 하동에서 조선 백성 900명을 납치했고(『선조실록』 6년 3월 14일), 1574년 5월에는 왜구가 명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기도 했다(『선조실록』 7년 5월 14일). 1576년에도 왜구가 제주도에 나타나 10여 명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다(『선조실록』 9년 4월 3일). 1586년에는 제주도에 왜구가 출몰하여 조선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선조실록』 19년 6월 3일). 이 시기 이처럼 왜구의 출몰이 빈번했지만 조선 조정은 왜구의 침략을 막지 못한 장수나 관료를 문책하는 데 그쳤을 뿐 근본적인 방어책은 마련하지 못하였다.

발단

1587년 2월 왜선이 흥양을 침략하자 녹도권관(鹿島權管)이대원(李大源)은 왜구 수 십 명의 목을 베었다. 왜선은 다시 손죽도를 침범하였다. 수사(水使)심암(沈巖)은 이대원을 척후로 삼았는데 응원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다. 이대원이 거느린 군사는 왜구에 비해 소수여서 결국 이대원은 전사하였다. 조선 조정은 심암을 효수형에 처하고 좌방어사(左防禦使)변협(邊恊)과 우방어사(右防禦使)신립(申砬) 등을 파견했지만 이미 왜선은 모두 돌아간 후였다(『선조수정실록』 20년 2월 1일). 손죽도 전투에서 전사한 이대원은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또 그의 고향에는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1588년 11월 손죽도 전투 당시 납치되었다가 명으로 탈출한 김개동(金介同)과 이언세(李彦世) 등이 명에 파견되었던 사은사유전(柳㙉)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김개동 등은 왜구의 손죽도 침략 때 진도 사람 사화동(沙火同)이 길 안내를 하였다는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선조실록』 21년 11월 17일). 이 사실은 1590년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할 때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경과

1587년 3월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마도(對馬島) 도주 종의지(宗義調)에게 조선이 사신단을 보내 일본에 조회하게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종의지는 1587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89년에는 대마도 도주 종의조(宗義調)가 승려 현소(玄素)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다시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의 계속된 요청에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일본보다 상국의 입장이었던 조선으로서는 사신 파견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 결과 손죽도를 침략했던 왜구와 왜구를 도운 조선의 반역자[叛民]를 보내고 피로인을 쇄환하면 사신을 파견하겠다고 답했다(『선조실록』 22년 8월 4일). 조선의 요구는 받아들여져 1590년 2월 28일 반민(叛民) 사화동(沙火同, [沙乙火同, 沙乙背同, 沙乙浦同])과 피로인 116명, 손죽도를 침략했던 긴시요라(緊時要羅)·삼포라(三浦羅)·망고시라(望古時羅) 등 3인을 쇄환하였다. 조선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던 만큼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방기철, 『조일전쟁과 조선인의 일본인식』, 국학자료원, 2010.
  • 김덕진, 「1587년 손죽도 왜변과 임진왜란」, 『동북아역사논총』29, 동북아역사재단,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