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아진(小波兒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시대 평안도 벽동군에 속한 만호진.

개설

소파아진은 평안도 벽동(碧潼)의 압록강 연변에 설치한 관방시설로 세종대에 처음 만호(萬戶)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땅이 좁고, 사람이 적게 산다는 이유로 문종대에 만호를 혁파하고 권관(權管)이 파견되었다. 조선후기까지 소파아진이 유지되다가 고종대에 혁파되었다. 지리적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요충지로, 조선전기에 건주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행성(行城)이 설치되었다.

자연환경

소파아진은 서쪽으로 신리북산을 넘어 대파아진의 송2리, 동쪽으로 조골령을 경계로 자강도 우시군, 남서쪽으로 벽동군이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마주 보고 있다. 지형적으로 남쪽과 동쪽이 높고 북쪽이 낮고, 동천(東川)과 남천(南川)이 북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합류한다. 전반적으로 산지가 많아서 경지가 매우 부족하여 농경에 적합하지 않다.

변천 및 현황

소파아진은 1442년(세종 24)에 평안도도체찰사(都體察使)이숙치(李叔畤)의 주장에 따라 바로 옆의 대파아(大波兒)와 함께 만호가 배치되었다(『세종실록』 14년 1월 17일). 그리고 세종대 평안도 연변에 행성을 쌓을 때, 소파아(小波兒) 송림현(松林峴)으로부터 비소리평(非所里平)에 이르렀고, 그 거리는 15리 50보(步)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강계 도호부 위원군]. 1450년에 벽동·소파아구자(小波兒口子)는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게 살며, 이미 행성을 축조했다는 이유로 만호를 혁파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1일). 이후 소규모 진보를 방어하는 종9품의 무관인 권관이 파견되었다.

1490년 9월에 만포첨절제사허곤이 건주위인 7명의 목을 벤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과 건주여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압록강 연변의 수비를 강화하여 대파아진과 소파아진을 쌓았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청이 건국된 이후 소파아진의 맞은편 지역이 봉금(封禁) 지역으로 정해지면서 이 지역에 대한 중요도가 낮아졌다. 결국, 소파아진 등 압록강 연안의 진보가 거의 다 쇠락하여 군사도 몇 명 남지 않아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소파아 등을 혁파하였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형태

소파아성은 벽단군에서 북쪽으로 40여 리(약 15.7㎞) 떨어진 압록강 변에 설치되었다. 1492년(성종 23)에 소파아성을 쌓았는데, 높이는 7척(약 2m)이고 둘레는 850척(약 257.6m)이었다(『성종실록』 23년 3월 30일). 한편,『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석축의 둘레 425척(약 129m), 높이 4척(약 1.2m)이라고 하고, 『만기요람』에는 석축의 둘레가 420척(약 127.3m)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조보감(國朝寶鑑)』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유래집(북한편)』2,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