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완구(小碗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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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만든, 포구(砲口)가 밥그릇처럼 생긴 소형 화포(火砲).

개설

완구는 조선시대에 만든 화포 가운데 하나로, 주로 청동으로 제작하였다. 완구라는 명칭은 포구가 밥그릇[碗]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단석(團石),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무거운 탄환을 장착해 발사하였다. 다른 화포에 비해 포신(砲身)이 길지 않았으므로 사거리가 짧아 수평 발사가 어려운 까닭에 주로 곡사포로 활용되었다. 성을 방어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성이나 소규모 진지를 공격할 때도 많이 쓰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18일). 세종대에는 그 크기에 따라 대·중·소 세 종류로 구분되었는데, 그중 가장 작은 것이 소완구였다. 군례에 참여한 군사들이 의장용 또는 신호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세종대 이후에 화포 개량이 거듭됨에 따라, 조선초기에 개발된 소완구도 그 형태가 점차 변모하였다.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는 세종대의 완구를 개선한 총통완구(銃筒碗口)에 대한 설명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총통완구는 이전의 완구보다 포신이 더 짧다. 상부는 완과 모통(冒筒), 하부는 격목통(激木筒)과 약통(藥筒)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부와 하부가 분리되는 구조를 갖는 것이 특징이다.

1635년(인조 13)에 이서(李曙)가 편찬한 화기(火器) 교범서인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는 대완구·중완구·소완구·소소(小小)완구의 발사법이 기록되어 있다. 소완구의 경우 한 번 발사하는 데 소모되는 화약의 양은 8냥, 격목의 길이는 2촌 5푼, 단석의 무게는 11근 1냥, 사거리는 500보였다. 격목은 약통 안의 화약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연소 가스의 압력을 발사체에 최대한 전달할 목적으로, 약통과 발사체 사이에 끼워 넣는 나무 조각을 말한다. 1813년(순조 13)에 박종경(朴宗慶)이 편찬한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별대완구(別大碗口)와 대완구·중완구만 소개되어 있어, 이 시기에는 소완구의 제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완구는 다른 완구에 비해 위력이 떨어져 조선초기부터 그 실효성 논란이 일었으나, 무게가 가벼워 운반과 이용이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664년(현종 5) 5월에 강도어사(江都御史)민유중(閔維重)이 강화도의 군비 상태를 점검하고 올린 장계를 살펴보면, 소완구 30개가 대완구, 호준포(虎蹲砲), 조총 등의 화기와 함께 비축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현종개수실록』 5년 6월 22일).

형태

『세종실록』「오례」의 「군례서례(軍禮序例)」에는 대완구와 소완구의 그림만 실려 있다. 정확한 명칭 없이 세종대에 제작된 다른 화포와 함께 총통(銃筒)이라는 표제로 묶여 있지만, 포구와 발사체의 모양 등으로 보아 완구임이 분명하다. 설명이 없어 상세한 제원은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조선후기의 완구 유물과 비교해 보면 포신이 상당히 길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에는 대·중·소 세 종류의 완구가 있었다. 소완구는 작아서 운반과 사용이 편리하였으나, 위력이 약해 실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에 비해 공성(攻城)의 위력이 있는 중완구는 소[牛]에는 적재할 수 있었지만, 말[馬]에는 실을 수 없었다. 중완구보다 더 무거운 대완구는 적재와 운반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에 따라 말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소완구와 중완구의 중간쯤 되는 새로운 완구를 개발하려 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27일). 한편 세종대에는 청동으로 완구를 만들었는데, 원료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중국제 수철(水鐵) 완구를 대마도에서 들여와, 철로 주조할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즉위 8월 14일 8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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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 『융원필비(戎垣必備)』
  • 국방군사연구소 편, 『한국무기발달사』, 국방군사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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