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비(小西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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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안토도산(安土桃山) 시대의 무장.

개설

소서비(小西飛)는 조선 및 중국 사료상의 이름으로, 본래는 소서여암(小西如庵) 혹은 내등여안(內藤如安)으로 불렸다. 부친은 삼호씨(三好氏)의 중신인 송영구수(松永久秀)의 동생 심개(甚介)로 장뢰(長賴)로도 불렸다. 단파(丹波) 팔목성(八木城) 성주 내등씨(內藤氏)의 딸과 결혼해 내등씨의 가독을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내등충준(內藤忠俊)이라고 했는데, 1564~1565년 천주교도가 되어 세례명을 ‘조안’이라고 했다. 조안을 표기하는 한자명으로는 ‘여안(如安)’이나 ‘여암(如庵)’을 사용했다. 또한 당시 일본 무사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관위를 통칭으로 사용해 내등비탄수(內藤飛彈守)라고도 했다.

내용 및 특징

1565년 부친 송영장뢰(松永長賴)가 전사하자 여암이 가독을 계승했다. 그러나 당시 내등씨는 주변 적으로부터 영지를 침식당하는 어려운 상황에 몰려 있었다. 한편 당시 경도에서는 실정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족리의소(足利義昭)와 세력을 확대 중이던 직전신장(織田信長)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여암은 장군 의소의 편에 서서 신장 측과 적대했다. 1578년 신장의 가신인 명지광수(明智光秀)의 공격으로 본거인 팔목성(八木城)이 함락되고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거기에 의소의 몰락으로 낭인이 되었다.

그 뒤 1585년 무렵 같은 천주교 신자인 소서행장(小西行長)에게 등용되었다. 행장은 여암을 중용했고 소서(小西)라는 성씨의 사용도 허락해 그 뒤 소서여암(小西如庵)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소서행장과 함께 출진했다. 행장은 조선과 명의 실정에 밝아 전쟁의 불가함을 잘 알고 있었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선 및 명과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593년 6월 20일 여암은 명으로 파견될 강화사절로 정해졌는데, 명 입국 절차가 늦어져 다음 해 12월 7일 겨우 북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3일 소서비는 명 황제를 알현하고 그 뒤 대신들과 풍신수길의 책봉 문제를 논의했다. 그 뒤 1595년 정월 북경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명에서 온 책봉사가 수길에게 내건 조항은 수길의 생각과는 너무 달라 수길의 분노를 사고 결국 강화교섭은 파국을 맞았다.

1600년 관원[關ヶ原] 전투에서 패한 소서행장이 처형된 후, 여암은 천주교 신자인 비전(肥前)의 영주 유마청신(有馬晴信)의 주선으로 평호로 피할 수 있었다. 그 후 가등청정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곧 가가[加賀]의 대영주 전전씨(前田氏)의 객장(客將)이 되어 덕암(德庵)이라고 칭했다. 당시 전전씨의 거성인 금택성(金澤城)에는 천주교도 영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인 고산우근(高山右近)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여암은 우근과 함께 천주교 포교활동과 교회 건설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1613년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천주교도 추방령을 내려 1614년 여암은 우근 등과 함께 마닐라로 추방되었다. 추방된 후 마닐라 근교에 일본인 천주교도의 마을을 건설해 살다가 1626년 병사했다.

활동 사항

조선과 중국의 사료에서는 소서여암이 소서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소서여암의 통칭인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소서비의 이름이 『선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그가 명으로 가기 위해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온 직후의 기사에서이다. 여기에서는 ‘소서비탄수’라 하고 있다(『선조실록』 26년 7월 5일). 그런데 그 이후로는 보통 ‘소서비’라 하고 있으며, ‘여안’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곳도 있다(『선조실록』 28년 6월 26일)(『선조실록』 28년 7월 2일).

여암이 나선 화의교섭에서 일본과 명 혹은 조선 측의 입장이 지나치게 달랐다. 교섭 당사자들이 자의적으로 조정하여 결국 교섭은 파국에 이르는데 이런 양상은 『선조실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암이 북경으로 들어가기 전 심유경은 봉공을 위해 풍신수길의 항복표문을 소서행장에게 요구했고 이것을 받은 뒤에야 여암은 북경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표문의 내용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수길이 책봉을 요청하는 등 풍신수길이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또한 그 문장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도 ‘문법과 체제가 왜노가 지은 것은 아니다’라고 하며 의심하고 있었다(『선조실록』 27년 2월 11일). 이 항복표문은 심유경과 소서행장·소서여암의 공모하에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명통감』, 『명사기사본말』 등의 중국 사료에 의하면 여암은 북경에서 수길의 책봉과 관련해 명의 당국자들로부터 필담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받았는데, 그것은 첫째, 책봉을 승인한 후 부산에 머물고 있는 왜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조선·대마도에 남지 말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갈 것, 둘째, 책봉 외에 별도의 공시(貢市)는 허가하지 않을 것, 셋째, 조선과 수호하고 다시는 침범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여암은 일일이 직접 적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을 일본의 공식 입장이라고 명 측은 받아들여 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것은 여암의 독단적 결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조건을 일본 측이 수락했다는 관련 내용은 요동으로부터의 자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그러나 이런 여암의 약속에 대해 조선 조정에서도 걱정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진위 확인은 어렵지만 여암이 ‘만일 이 맹세를 저버린다면 관백 평수길이 마땅히 죽을 것이다.’라고까지 맹세했다고 한다(『선조실록』 28년 1월 30일).

행장과 여암이 화의를 성립시키기 위해 풍신수길의 뜻을 속이고 있었던 것에 반해 그들과 갈등이 심했던 가등청정은 북경에서의 교섭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행장 등의 행위를 비난하며 수길의 본래 요구를 조선 측에 밝혔다(『선조실록』 27년 5월 6일). 그리고 여암이 명의 책봉사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던 1595년 3월에는 여암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으며 행장과 심유경의 일은 모두 거짓이라고 비난하며(『선조실록』 28년 3월 24일), ‘행장이 제시한 세 가지 일은 관백의 명령이 아니다.’라고 하고 있다(『선조수정실록』 28년 3월 1일).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조선 측도 이 강화교섭에서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밖에 결국 여암의 화의교섭은 무산되지만 풍신수길이 진실을 알기 전 교섭 성공을 기뻐하며 여암의 공적을 칭찬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선조실록』 28년 6월 26일). 또한 여암이 일본으로 돌아간 뒤 다시 머리를 깎고 왜복으로 갈아입었다는 내용과 더불어 여암이 “어찌 나만 유독 명나라 모양을 하고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선조실록』 29년 1월 21일 2째기사], 이를 통해 그가 명과의 교섭 중에는 명의 복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경인문화사, 2010.
  • 各務英明, 『殉教―戦国キリシタン武將內藤如安の生涯』, 朝日ソノラマ, 1988.
  • 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吉川弘文館, 1999.
  • 楠戶義昭, 『聖書武將の生々流転―豊臣秀吉の朝鮮出兵と內藤如安』, 講談社, 2000.
  • 北島万次, 『豊臣秀吉の朝鮮侵略』(日本歴史叢書), 吉川弘文館, 1995.
  • 루이스 프로이스, 정성화·양윤선 옮김,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살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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