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두리(所豆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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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장수 바두리([巴都禮], baduri)의 한자 이름.

개설

바두리는 퉁기야([佟佳], tunggiya)씨로 마차([馬察], maca) 지방에서 세거하다가 동생 뭉가투([蒙阿圖, 孟阿圖], munggatu)와 함께 500호를 이끌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 nurhaci)에게 귀부하였다. 누르하치는 바두리를 자르구치([札爾固齊], jargūci)의 반열에 들게 하고, 그들이 거느리고 온 500호를 2개의 니루로 만들어 만주 정백기(正白旗)에 예속시키고 바두리와 뭉가투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였다. 바두리는 전공으로 승진하여 이등유격(三等遊擊), 삼등유격을 역임하였고, 1631년 후금에 육부(六部)가 설치되자 예부(禮部) 승정(承政)에 임명되었다. 1634년 명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이후 삼등부장(三等副將)으로 증직되었다. 바두리는 소두리(所頭里)·소도리(所道里)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所’는 ‘소’가 아닌 ‘바’라는 발음을 한문으로 기재한 것이었다.

가계

바두리는 6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의 둘째 아들인 졸로([卓羅], jolo)가 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활동 사항

바두리는 처음 건주여진으로 귀부하였을 때 자르구치에 임명되었고, 자신의 니루를 직접 관장하다가 이후 삼등 유격으로 승진하였다. 1625년에는 여순(旅順)에서 명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명의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사르후성을 기습하였을 때 이를 잘 방어하였다. 1629년 후금이 명의 준화(遵化)를 함락할 때 세운 전공으로 이등 유격으로 승진하였다. 1630년에는 지르갈랑을 수행하여 영평(永平)을 방어하였으며, 후퇴할 때 포위망을 돌파한 공을 인정받아 처벌을 면하였다. 1631년 후금에 육부가 설치되자 예부(禮部) 승정(承政)에 임명되었다. 1634년 후금이 명의 선부(宣府)와 대동(大同)을 공격할 때 왕가장(王家庄)에서 전사하였다.

바두리는 조선이나 명과의 교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의주 중강이나 명의 장가구(張家口) 등지에서 무역하기도 하였다. 바두리는 특히 조선과 인연이 깊었다. 1621년 심하(사르후[薩爾滸]) 전투 이후 후금으로 파견된 만포첨사정충신과의 교섭에도 참여한 바 있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10일).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 시작된 의주 중강(中江)에서의 교역에도 참가하여 조선의 미진한 준비 상태를 힐난하고 상경을 허락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6년 2월 28일)(『인조실록』 6년 3월 3일). 1632년에는 호시(互市)와 관련한 물목의 수량과 가격 등을 조정하기 위하여 차하라([察哈喇], cahara) 등과 함께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때 바두리는 평안도관찰사와 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개성유수 등 4명의 대관(大官)으로 하여금 성을 나와 영접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분노를 표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0년 11월 6일). 1634년 선부와 대동에서 벌어진 명군과의 전투에서 바두리 등 후금의 장수들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조선은 후금이 명에 대한 군사적 열세에 처하였다고 정세를 오인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2년 11월 30일).

상훈 및 추모

바두리는 1634년 전사한 뒤 공로를 인정받아 삼등 부장으로 추증되었고, 그의 둘째 아들 졸로가 그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1656년 순치제는 그에게 ‘민장(敏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

참고문헌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만문노당(滿文老檔)』
  • 『청사고(淸史稿)』
  •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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