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곶역(평안도 대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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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의 도로망인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소곶역(所串驛)은 조선전기 세종대에는 평안도관로찰방(平安道館路察訪)에 속한 역이었다. 그 뒤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大同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정녕현 편에 따르면, 소곶역은 정녕현에 설치된 유일한 역관(驛館)이었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춤에 따라 생양역(生陽驛)·대동역(大同驛)·안정역(安定驛) 등과 함께 평안도 관로찰방 소속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평안도 의주 편에 따르면, 소곶역에는 역마 4필과 역노(驛奴) 90명, 역비(驛婢) 8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소곶역은 세조대의 역제 개편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제정 및 편찬하는 과정에서 대동도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후 조선후기까지 대동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소곶역은 조선전기에는 소곶관(所串館)으로, 조선후기에는 소관참(所串站)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1424년(세종 6)에는 소곶관·운흥관(雲興館)·거연관(車輦館) 등의 관(館)이 신안참(新安站)·임반참(林畔站)·양책참(良策站)·의순참(義順站) 등 각 참(站)의 중앙 요지에 해당하므로, 지방 관아의 경비 조달을 위한 토지인 늠전(廩田)을 더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역에서 역마를 길러 공용으로 바치는 입마(立馬)가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기 위해, 각 관에 있는 보충군(補充軍)과 혁파한 절의 사내종 가운데에서 지원자를 받아 참(站)마다 10호씩 더 정착해 살도록 하였다(『세종실록』 6년 3월 23일).

한편, 신안관에서 임반관, 임반관에서 양책관, 양책관에서 의주까지의 역 간 거리가 멀어 역마가 견디지 못하고 죽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자, 1434년(세종 16)에는 규모가 작은 소관(小館)인 소곶관·운흥관·거연관 등 세 관을 대관(大館)의 격에 따라 처우하여 역민(驛民)과 역마를 더 두게 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25일).

1477년(성종 8)에는 소곶관에 설치한 목책이 견고하지 못하므로, 근처에 있는 옛 성터를 수축하여 병사를 주둔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8년 6월 17일). 이를 통해 소곶관을 비롯한 평안도의 각 관은 중국 사신이 머무르는 역관이자 외적을 막아 내기 위한 주요 방어 진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소곶역은 원래 의주목 정녕현에 있었는데, 1444년(세종 26)에 방산현(方山縣)으로 옮겨졌다.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의주목 관아 남쪽 33리,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관아 남쪽 35리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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