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대(洗心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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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꽃구경 터로 유명한 경승지.

개설

세심대(洗心臺)는 정조가 육상궁 등을 참배한 후 들러서 한양 일대를 내려다보며 상화 또는 활쏘기를 즐기던 장소이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일대에 있었다. 정조가 경모궁을 조성할 때 터를 잡았다고 하며, 한양의 유명한 상화 장소였다. 세심대는 1819년(순조 19)에 김매순(金邁淳)이 쓴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서 인왕산필운대, 남산잠두봉과 함께 한양의 3대 꽃놀이 장소였다. 그러나 정조는 꽃만 구경한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 활을 쏘거나 세심대 근처에 거주하는 유생들을 불러 칠언 소시(小詩)를 지은 후 화답하게 하는 향유의 장소로 이용했다. 철종은 시험을 보는 장소로 이용했다.

변천 및 현황

한양에서 유명한 꽃구경 장소로 정조대에 조성되었다고 알려지나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세심지의 위치는 정조가 경모궁을 조성할 때 터를 잡았던 곳이며(『정조실록』 19년 3월 7일), 아버지 장조(莊祖)를 여읜 애통함을 달래기 위해 선희궁 배알 때마다 올랐다고 한다(『정조실록』 15년 3월 17일). 이후에도 정조는 매년 육상궁과 선희궁에서 참배하고 신하들과 함께 세심대에 올랐다(『정조실록』 15년 3월 17일)(『정조실록』 15년 3월 17일). 정조는 편여(便輿)를 타고 세심대에 올랐으며, 나이든 신하를 위하여 구장(鳩杖)을 선사하여 오르기 쉽도록 도왔다고 한다(『정조실록』 16년 3월 20일). 이처럼 정조는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놀이의 향유에만 그치지 않고 세심대의 유래를 신하들에게 전하거나 세심대에 자주 오르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정조는 세심대 남쪽에 작은 표적을 설치한 후 참석한 문·무신들에게 편을 나누어 활쏘기 시합을 벌이고 상을 내리기도 했다(『정조실록』 15년 3월 17일)(『정조실록』 18년 3월 13일)(『정조실록』 19년 3월 7일). 이처럼 정조대에 활발한 행차를 보였던 장소인 세심대는 철종대에 다시 등장한다. 철종은 세심대를 놀이의 향유가 아닌 시취(試取) 장소로 활용하여 차이를 보인다(『철종실록』 4년 3월 11일).

관련사건 및 일화

1795년(정조 19)에 정조는 세심대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활을 쏘게 한 후 도총관이민보(李敏輔)에게 이르기를, “매년 이 행차에 경들과 함께 올라왔다. 1791년(정조 15) 봄에 내가 지은 시 가운데 ‘자리에 앉은 많은 백발노인들, 내년에도 지금처럼 술잔 들으리.’라는 구절과 그 이듬해 지은 시 중에서 ‘마음에 맞는 동서울 노인, 탈 없이 시 짓고 술잔 드누나.’라는 구절이 모두 경들을 가리킨 것이다. 오늘 놀이 역시 경들이 전담케 해야 하겠다.”라고 했다. 더불어 정조는 60세가 넘은 신하들에게 모두 지팡이를 하사하여 산을 오르는 데에 편하게 하라고 명하기도 했다(『정조실록』 19년 3월 7일).

참고문헌

  •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