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부(成川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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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성천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성천부(成川府)는 조선시대에 성주(成州)에서 성천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군사적 전략기지로서 거진(巨鎭)을 두어 종3품의 도호부사가 인근 11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평양부 성천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성천부는 고려시대 1018년(고려 현종 9)에 성주방어사(成州防禦使)가 되었으며, 뒤에 성주가 되어 종4품의 지주사를 두었다. 조선초기에 상주인구 1천 호가 넘는 지역을 도호부로 승격할 때 설립되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 세종 때 거진이 되어 인근 고을을 관할하였다. 다른 이름으로 비류(沸流), 송양(松讓), 졸본부여(卒本夫餘), 다물(多勿), 강덕진(剛德鎭)이라고도 불렀다.

조직 및 역할

성천부는 고려시대에 성주(成州)로 종4품의 지주사(知州事)를 두어 다스리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406년(태종 6)에 지방 관서와 관리의 칭호를 개정할 때 지주사를 지군사(知郡事)로 개칭하고, 1413년(태종 13)에 행정구역 이름을 성천군으로 바꾸었다. 1415년(태종 15)에 성천에 거주하는 인구가 1천 호를 넘어 도호부로 승격하여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도호부사와 교수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교수를 폐지하였다. 종6품의 교수는 교관으로 지방에서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성천도호부사는 거진인 성천진관(成川鎭管)의 책임자가 되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면서 11개 고을의 제진(諸鎭)에 대하여 군사적 명령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성천부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3명, 영뢰고(永賴庫) 도청(都廳) 1명, 도감 1명, 각 창고의 도감 12명, 감군 1명, 각고(各庫) 도감 6명, 감관 4명, 전안도감 1명, 중군 1명, 훈련영장 1명, 군관행수 8명, 병방군관 3명, 기고관 4명, 집사 8명, 난후영장 1명, 별군관좌장 1명, 별군관우장 1명, 작대천총 1명, 아병영장 1명, 민영별장 1명, 천총 3명, 파총 5명, 초관 20명, 영장 4명, 기패관 7명, 병영파총 1명, 자성초관 2명, 아전 48명, 서원 25명, 통인(通引) 41명, 사령 25명, 군뢰(軍牢) 25명, 관노 57명, 관비 65명이 있었다.

변천

조선이 건국한 후 1413년에 종2품의 관리가 파견되는 고을 이외의 지명에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대상으로 지방행정구역을 개정할 때 군현 이름 가운데 주 자가 있는 지명은 산(山) 자나 천(川) 자로 바꾸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이에 고을 이름을 성주에서 성천군으로 바꾸었다. 1415년에 전국에 1천 호가 넘는 군(郡) 7곳을 도호부로 바꿀 때 승격하였다. 성천이 지리적으로 평양의 서쪽 일대를 방어할 수 있는 주요 군사기지에 위치하여 세종 때 진관을 설치하여 거진으로서 덕천(德川)·개천(价川)·자산(慈山)·순천(順川)·상원(祥原)의 5개 군과 양덕(陽德)·맹산(孟山)·삼등(三登)·강동(江東)·은산(殷山)의 5개 현을 관할하였다. 이후 토성(兎城)이 추가되었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평양부 성천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