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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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5년(태종 5)∼1418년(태종 18) = 14세]. 조선 전기 태종 때 활동한 왕자. 태종(太宗)이방원(李芳遠)의 적출 제 4왕자. 봉작은 성녕대군(誠寧大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민제(閔霽)의 딸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이제(李禔), 효령대군(孝寧大君)이보(李*), 세종(世宗)의 동생이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가장 사랑한 왕자

이종(李褈* 示+重)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행동거지도 공손하여 태종과 원경왕후가 끔찍이 사랑하여,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변계량이 쓴 「성녕대군신도비명」을 보면,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왕과 왕후가 지극히 사랑했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했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고, 조금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능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도 한결같이 어른과 같으니, 전하(殿下)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서, 평상시 기거할 때나 음식을 드실 때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 하였다.[『춘정집(春亭集)』 권12 「유명조선국대광보국 성녕대군 변한소경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이하 「성녕대군신도비명」으로 약칭]

처음에 성녕군(誠寧君)에 봉해졌다가, 1414년(태종 14) 1월 나이 10세 때에 성녕대군으로 진봉되었다. 그해 12월 창녕 성씨(昌寧成氏)대호군(大護君)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가가는 날 성녕대군이 대궐 문을 나와서 말을 타자, 말굴레 위의 모발 장식이 말 앞에 굴러 떨어지니, 모두 놀라고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14년 12월 22일) 혼인한 다음에 부인 성씨는 경녕옹주(敬寧翁主)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14) 9월 정1품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에 올랐고, 부인 정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 1월 성녕대군이 천여두[豌豆瘡]에 걸려서 병이 위독하였다. 그때 충녕대군이 의원(醫員)을 데리고 밤낮으로 동생 이종의 곁에 붙어있으면서, 자세히 의서(醫書)의 처방법을 찾아내어 친히 약제를 조제하여 먹이고 병을 간호하니, 태종과 원경왕후가 그 지극한 정성에 감복하였다.[『태종실록』태종 18년 1월 26일] 그러나 병세는 차도가 보이지 않고 점차 악화되어, 1418년 2월 5일 성녕대군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14세였다.

변계량의 「성녕대군 신도비명」을 보면, “병이 들자, 왕과 왕비가 지극히 걱정 근심하여, 기도하고 치료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였으나, 급기야 돌아가자, 극도로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고, 사흘 동안 정사를 보는 것을 중지했다. 당시 전하(殿下)께서 지나치게 애통한 나머지 몸과 기운이 상당히 좋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원로대신들이 육선(肉膳)을 들도록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소찬(素饌)만을 먹으면서 30일을 지냈다.”고 하였다.[『춘정집』 권12 「성녕대군신도비명」] 여기서 당시 태종과 원경왕후가 막내아들 성년대군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얼마나 슬퍼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왕자를 잃어버리자, 생시에 성녕대군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서울의 궁전에서 살기가 싫어서,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에게 정치를 맡기고, 왕후와 함께 개성의 옛 궁전 수강궁(壽康宮)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세자 양녕대군이 위임 받은 정치를 성실하게 잘 하였더라면, 태종이 아마도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자 양년대군은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기생 어리를 세자빈이 있는 동궁(東宮)에 불러들였다. 궁으로 들어온 어리가 아기를 낳자, 태종이 격노하여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8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세자 충녕대군에게 바로 넘겨주었다. 성녕대군이 죽고 난 뒤에 불과 6개월 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세종에게 왕위를 선양한 뒤에 2년 만에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돌아가고, 4년만에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여, 막내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나라 역사상 왕이 살아 있을 때 자의적으로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준 사람은 태종 한 사람뿐이다. 조선의 세종은 4년 동안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왕 노릇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훈련 받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聖君)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경(昭頃)이다. 1418년(태종 18) 변한국공(卞韓國公)으로 추봉하고, 1872년(고종 9)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산기슭에 있는데, 춘정(春亭)변계량(卞季良)이 지은 신도비가 남아 있다.[『춘정집』 권12 「성녕대군신도비명」] 성녕대군의 무덤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대자암(大慈菴) 부근에 있는데, 대자암은 1418년 4월 태종이 성녕대군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세운 절이다. 부인은 창녕 성씨성억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으므로, 세종이 제 3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용(李瑢)을 양자로 보내어 성녕대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 부자가 죽음을 당하자, 세조가 효령대군의 제 6자인 원천군(原川君)이의(李宜)를 그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선원록계보(璿源錄系譜)』
  • 『춘정집(春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