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배이(薛裴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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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미국의 외교관이자 해군 제독.

개설

슈펠트는 1866년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자 한 미국 정부에 의하여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으며, 1882년 조선 정부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가계

슈펠트는 1822년 뉴욕주 레드후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슈펠트 가문은 1710년 네덜란드로부터 뉴욕으로 이민하여 정착하였다.

활동 사항

슈펠트는 1839년 5월 해군사관학교 수습사관에 임관하면서 해군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845년 7월에 해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1953년 10월 해군 대위로 승진한 후 1854년 6월 해군을 퇴역하였다. 이후 슈펠트는 미국 상선대(Merchant Marine)에 들어가 상선의 선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쿠바의 아바나주재 미국 총영사로 임명되어 외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

슈펠트는 1863년 다시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중령으로 임명되고, 아시아함대에 배속되어 태평양 지역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미국 상선이 청과 무역통상을 하면서 청의 해적들에게 약탈당하는 경우가 발생하자 미국 상선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 슈펠트는 제너럴셔먼호(The General Sherman) 사건을 조사하라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벨제독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1867년 군함 워츄셋(Wachusett)호를 이끌고 조선으로 와 조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슈펠트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함께 황해도 서해안과 남해의 거문도를 조사한 후 미국 정부에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1869년 해군 대령으로 승진한 뒤, 1875년부터 1878년까지는 해군성 장비 및 신병보충국장에 임명되어 해군특별훈련병제도를 수립하여 실시하였다.

슈펠트는 1879년 군함 타이콘데로가(The Ticonderoga)호를 타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항행한 후 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조미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다시 1880년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중재를 통해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 이홍장과 청 정부는 미국 정부의 대조선통상조약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슈펠트가 일본의 중재를 요청하며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 이홍장은 나가사키주재 청국공사를 통하여 청 정부가 조선과의 교섭을 주선할 의향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슈펠트는 일본의 중재에 의한 조선과의 교섭에 실패한 후 청국 천진(天津)으로 갔다. 그는 이홍장(李鴻章)에게 조선과의 교섭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홍장이 이를 수락하였다. 1881년 6월 슈펠트는 블레인(J. G. Blaine)국무장관으로부터 교섭 전권을 부여받고 북경(北京)으로 갔다. 그는 이홍장과 교섭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1882년 3월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청국의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왔다(『고종실록』 19년 3월 15일).

조선 정부는 전권대신으로 신헌(申櫶), 그리고 부관 김홍집(金弘集)을 임명하여 조약 교섭에 임했고, 마침내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고종실록』 19년 4월 6일). 조약 체결 직후 슈펠트는 귀국하여 1883년 해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884년 퇴역하여 워싱턴에서 머물렀으며, 1895년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미국 워싱턴 D. C. 알링턴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참고문헌

  • 이민식, 『근대 한미관계연구』, 백산자료원, 1998.
  • 김원모, 「슈펠트의 탐문항행과 조선개항계획, 1867」, 『동방학지』 35, 1983.
  • Frederick C. Drake, The Empire of the Seas: A Biography of Rear Admiral Robert Wilson Shufeldt, USN. Univ. of Hawaii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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