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혜법(宣惠法)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 광해군 때 공납제의 모순을 개선하기 위하여 마련된 재정제도.

개설

조선시대 백성이 국가에 납부하는 여러 형태의 조세 가운데 특정 현물(現物)로 바치는 공납(貢納)이 있었다. 공납은 각 군현의 특성에 맞게 분정(分定)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任土作貢], 공납제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이 원칙이 준수되기 어려워 민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채택한 방식이 대납(代納)이었다.

공물(貢物) 대납은 고려 때부터 행해졌다. 공물과 진상(進上) 등 현물의 종류, 분정 및 납부 시기, 납세자의 환경 등에 따라 공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대납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대납은 국가에서 인정한 공납 방식이 아니었고, 대납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커서 결국 민폐를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태종대부터 공납제 운영에 대한 개선 방안이 모색되었는데, 주로 공액(貢額)을 줄여 민의 공물 부담을 줄이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연산군대에는 부족한 재원을 채우기 위하여 다시 공액을 늘이는 조치가 취해졌다. 특히 16세기 이후에는 지방 유통경제의 발달 속에 공물을 대납하는 방납(防納) 행위가 크게 성행하였다.

한편 군현(郡縣) 차원에서 바쳐야 할 현물을 쌀값으로 환산하여 거두는 사대동(私大同)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납제 개선이 국가의 정책으로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광해군대부터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처음으로 경기도에 한해 공물과 진상 물품의 값, 공물 운송에 필요한 마초 값 등을 쌀로 징수하는(거두어들이는) 수미법(收米法)을 실시하였다. 경기도에 시행된 새로운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선혜법(宣惠法)이라고도 하였다. 선혜법을 대동법(大同法)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선혜법과 대동법이 현물 공납을 쌀로 바꾸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납에서의 불균등·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려는 대동(大同)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공납제의 폐단은 공액의 과다, 불산(不産) 공물의 분정, 방납(防納)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공납제 개혁 방안은 공안(貢案) 개정에 따른 공액 조절과 산(産)·불산(不産) 공물의 조정, 모리(牟利) 수단으로 전락한 방납제 근절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선조대 이이(李珥)는 그때까지의 공납제 개선 방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안하였다. 공물가를 토지 결수(結數)에 따라 쌀로 거두는 방안이었다. 이이는 당시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공물법, 즉 1결당 1말의 쌀을 거두는 것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쌀로 정부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다면 방납의 폐단, 공물의 납부 시기, 산·불산의 문제 등 여러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실시되지 못한 채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

인구의 감소, 백성들의 이산(離散), 농업 파탄 등으로 공물 장부인 공안(貢案)은 실효성을 잃게 되었고, 이에 따른 공납제 운영의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공물가를 쌀로 거두는 것을 제안하고, 1결당 2말의 쌀을 거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제안은 쌀 운반 경로 문제 및 운송의 폐단 등이 제기되어 1년 만에 폐지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인 1608년 3월 2일에 내린 전교(傳敎)에는 북쪽 후금(後金)에 대한 방어, 남쪽 일본과의 외교 관계 유지뿐 아니라 국내 재정 운영, 민생고(民生苦) 해결 방안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왕의 의지를 받들어 호조에서는 국가 재정 확보 및 공납제 운영 개선 방안을 내놓았다. 당시 호조 참의였던 한백겸(韓百謙)은 유성룡의 대공수미법을 보완한 공납 개선책을 내놓았다. 공납은 쌀로 하되, 쌀의 운송이 어려운 지역은 베[布]로 바칠 수 있도록 하는 개선안을 내놓았다. 또한 현물 공납이 꼭 필요할 때에는 바쳐야 하는 쌀과 베를 줄여서 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안을 내었다. 이 안건에 대해 영의정이원익(李元翼)이 동의하면서 1608년 5월에 새로운 대공수미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일부 조정 대신이 대공수미법의 단점 등을 내세우면서 법 시행에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전(量田) 시행, 호패법 강화, 공안 개정 등의 보완책을 내놓는 한편, 법의 전국적 시행에 앞서 경기도에만 실시하는 타협책이 마련되었다.

선혜는 ‘은혜를 베푼다[宣惠]’는 뜻으로, 선혜법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이름은 광해군이 민을 구제하는 방안을 내놓도록 조정 대신에게 지시하면서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務宣一分之惠]’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선혜법은 서울에 납부하는 경공물(京貢物)만 작미(作米) 또는 작포(作布)로 하고, 지방군현에서 소용하는 물품은 여전히 현물 공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경대동(京大同)이라고 하였으며, 서울에서 소용되는 공물에 대해서만 실시한, 부분적인 대동이므로 반대동(半大同)이라고도 불렀다.

내용

선혜법은 경기도에 한해 실시되었으므로 경기선혜법이라고도 하였다. 경기선혜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담당 관청으로 선혜청을 두고 도제조 1명과 부제조 1명, 낭청 2명을 두었다. 경기도 전체 민전(民田)에서 1결당 봄·가을로 각각 8말씩 모두 16말을 거두었다. 그중 14말은 경기도에서 서울로 상납하던 공물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고 나머지 2말은 각 군현에 두어 수령에게 필요한 재정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선혜청은 거두어들인 쌀을 방납인에게 물가에 따라 지급하여 안정적으로 물품을 공급받도록 하였다. 또한 도내에서 사신 접대가 많은 군현의 경우 징수할 쌀의 양을 줄여 부담을 경감시켰다. 이와 동시에 공평하게 세금을 거두기 위해 면세전(免稅田)을 줄이고, 공납 대상 토지를 늘여 쌀 징수량을 늘였다.

선혜법은 1결당 징수하는 수량, 쌀의 징수시기를 명시하였으므로, 아무리 가렴주구가 심한 군현일지라도 정해진 법외에 더 거두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변천

반정(反正)을 통해 즉위한 인조에게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하고 약해진 민생과 국방을 정비하고, 반정과 관련된 인물들의 논공행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민생은 국가 재정 확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고 이는 곧 양전(量田) 실시, 경기선혜법의 다른 지역 실시로 이어졌다. 선혜법 확대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이에 대한 개선책이 계속 제안되면서 선혜법 확대 실시에 대한 명분이 마련되었다.

1623년(인조 1) 강원도·충청도·전라도를 대상으로 하는 삼도대동청(三道大同廳)이 설치되고 선혜법은 대동법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확대·실시되었다. 그러나 당해 흉년이 들어 쌀의 징수율이 크게 떨어지고, 쌀 운송 등의 문제점이 야기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대동법 실시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이런 이유로 1624년(인조 2)까지 삼도대동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채 폐지되고, 1624년 강원도 대동법만 유지되었다.

이후 1652년(효종 3)에는 충청도에, 1658년(효종 9)에는 전라도 연해 지역에, 1666년(현종 7)에는 전라도 산군 지역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이후로도 함경도· 경상도·황해도 순으로 대동법이 확대·실시되었다. 1608년 실시된 경기선혜법은 이후 100여년에 걸쳐 보완·개선·재정립되면서 대동법이란 이름으로 시행되었고, 결당 16말을 거두던 공물가도 현종대에 12말로 고정되었다. 이와 같은 대동법은 지방 재정의 안정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일조각, 1988.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한영국, 「대동법의 시행」, 『한국사』 30 ,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