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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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선성군 이무생 |
한글표제 | 선성군 이무생 |
한자표제 | 宣城君 李茂生 |
분야 | 왕족/왕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태종~단종 |
집필자 | 윤경수 |
봉작 | 선성군(宣城君) |
시호 | 양정(良靖) |
출신 | 양반, 왕족 |
성별 | 남자 |
본관 | 전주(全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군 덕봉역(德峯驛)『선원보』 (현)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 산64번지 9『선원강요』 |
증조부 | 이자춘(李子春) |
조부 | 이성계(李成桂): 태조(太祖) |
부 | 이방과(李芳果): 정종(定宗) |
모_외조 | 숙의 지씨(淑儀池氏): 충주지씨(忠州池氏), 지윤(池奫)의 딸 |
형제 | (형)이원생(李元生): 의평군(義平君) (동생)이호생(李好生): 임성군(任城君) |
처_장인 | (첫째부인)영일정씨(迎日鄭氏): 정종성(鄭宗誠)의 딸 →(자녀)1녀 (둘째부인)안강김씨(安康金氏): 김중약(金仲約)의 딸 →(자녀)1남 |
자녀 | (1자)이귀손(李貴孫): 춘산부정(春山副正) (1녀)조충로(趙忠老)의 처 (서1자)이숭덕(李崇德): 추천부수(楸川副守), 추천령(楸川令) (서2자)이금정(李金丁): 명산부수(明山副守), 명산정(明山正) (서3자)이옥정(李玉石): 풍안부수(豊安副守), 풍안수(豊安守), 풍안부령(豊安副令) (서4자)이철정(李鐵丁): 설성부수(雪城副守), 설성령(雪城令) (서5자)이은정(李銀丁): 석보부수(石保副守) (서6자)이말정(李末丁): 병산부수(屛山副守) (서7자)이천정(李千丁): 도성부수(陶城副守) (서8자)이귀정(李貴丁): 덕양부수(德陽副守) (서1녀)오계손(吳季孫)의 처 (서2녀)우효손(禹孝孫)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 |
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전기 태종~단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 서출 제 4자. 봉작(封爵)은 선성군(宣城君)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머니 숙의지씨(淑儀池氏)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지윤(池奫)의 딸인데, 정종의 다른 후궁인 성빈 지씨(誠嬪池氏)와는 자매 간으로 보인다.
태종~단종 시대 활동
1400년(정종 2) 정종이 왕위를 태종(太宗)에게 양위하고 풍덕(豊德)에 머물 때, 이무생(李茂生)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한 것으로 전한다. 이를 보면 그는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출생연대는 알 수 없으나 1392년(태조 1)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이 알려진 시기는 세종~단종 연간이다. 원래는 성품이 순결(純潔)하고, 소박(素朴)해서 조용한 마음을 지켜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든 후에는 소탈하고 담백한 인품과는 다르게 광패(狂悖)하고 창기(倡妓)들과 사랑하여 왕자로서의 품위를 잃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세종실록(世宗實錄)』·『단종실록(端宗實錄)』·『세조실록(世祖實錄)』에 전한다. 왕자로서 유배생활을 하고 풀려났다가 다시 파직되었으니, 사회에 끼친 활동은 전하지 않고, 왕자로서 체면이 손상되는 사건만이 세종~단종 연간에 전하고 있다.
1425년(세종 7)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정윤(正尹)이 되었으나 1427년(세종 9) 작첩을 환수당하였다. 『세종실록』세종 9년 5월 9일조 기사를 보면, 세종이 정윤 이무생의 작첩을 거두고 황해도 배천(白川)에 부처(付處)시키고, 그와 물의를 일으킨 기생 자동선(紫洞仙)·간설매(間雪梅)·죽간매(竹間梅) 등에게 간통 혐의로 각각 곤장 90대씩 때리고, 고을로 내려 보내 고역(苦役)에 정속시키라고 의금부 당직관(堂直官)에게 명을 내렸다.
이후 유배 생활에서 풀어주고 다시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이우생은 다른 왕자들과 어울려 놀이 구경을 다니며, 개과천선을 하지 않고 기생과의 만남으로 학업을 게을리 하자 1444년(세종 26) 다시 배천으로 귀양가게 된 일이 『세종실록』세종 26년 10월 17일조 기사에 전한다. 1454년(단종 2) 3월 정의대부(正義大夫) 선성군이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에는 이무생이 창기 탁금아(濯錦兒)를 사랑하여 정처(正妻)를 내쫓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그는 정의대부 선성군에서 파직되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묘소의 위치는 하남시 덕풍 1동 산64에 있는데 하남시 지방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성군 묘역에는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이무생과 그의 부인 등 종문(宗門) 10여기의 묘가 있다. 이 묘역의 석물들은 조선시대 석물의 변천과 형태를 이해하는 데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비문은 이명상(李明翔)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1872년(고종 9)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첫째부인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정종성(鄭宗誠)의 딸이다. 자녀는 1녀를 두었는데, 평양조씨(平壤趙氏)조충로(趙忠老)의 처가 되었다. 둘째부인 안강 김씨(安康金氏)는 김중약(金仲約)의 딸인데, 아들 이귀손(李貴孫)을 두었다. 첩의 소생으로 8남 2녀가 있다. 1자는 추천부수(楸川副守) 이숭덕(李崇德)이고, 2자는 명산부수(明山副守) 이금정(李金丁)이며, 3자는 풍안부수(豊安副守) 이옥정(李玉石)이고, 4자는 설성부수(雪城副守) 이철정(李鐵丁)이다. 5자는 석보부수(石保副守) 이은정(李銀丁)이고, 6자는 병산부수(屛山副守) 이말정(李末丁)이며, 7자는 도성부수(陶城副守) 이천정(李千丁)이고, 8자는 덕양부수(德陽副守) 이귀정(李貴丁)이다. 서출 딸은 2명인데, 각각 오계손(吳季孫)과, 우효손(禹孝孫)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보(璿源譜)』
- 『선원강요(璿源綱要)』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충주지씨보략(忠州池氏譜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