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음각(惜陰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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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석음각 |
한글표제 | 석음각 |
한자표제 | 惜陰閣 |
관련어 | 경희궁(慶熙宮), 존현각(尊賢閣)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지혜 |
장소 | 경희궁 |
관련 인물 | 숙종, 영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석음각(惜陰閣)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36년 9월 18일, 『영조실록』 37년 2월 16일 |
경희궁에서 세자가 독서하는 서재.
개설
석음각(惜陰閣)은 본래 흥정당(興政堂) 동쪽 행랑이었다. 숙종은 세자를 자신이 정무를 보는 편전인 흥정당 주변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평소에는 흥정당의 서쪽 방에서 세자가 독서하였으나, 방의 규모가 협소하고 대신들이 입시할 때 공간이 부족하여 서쪽 방까지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흥정당 가까운 곳에 세자의 서재를 마련하였다.
1715년(숙종 41) 봄에 숙종은 흥정당 동쪽 행랑을 수리하여 석음각이라 이름 붙이고 세자로 하여금 강독 장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석음(惜陰)’이라는 말은 시간을 아낀다는 의미여서 왕이 된 자신이나 세자에게 꼭 새겨야 할 것이기에 서재의 이름으로 붙였다고 한다. 석음각을 마련하게 된 경위는 숙종이 쓴 「석음각기(惜陰閣記)」에 기록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석음각은 흥정당 동쪽 행랑에 있으며, 그 동남쪽에 존현각(尊賢閣)이 있다. 세자의 독서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그 주변에 있는 주합루(宙合樓)·동이루(東二樓)·홍월루(虹月樓) 등에 책을 보관하여 왕과 세자가 강독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변천 및 현황
1715년에 세자의 강독 장소로 마련하였으나, 1760년(영조 36)에 존현각을 세우고 세자의 강독 장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석음각은 사용이 줄어들었다. 영조는 석음각에서 대신들을 만나 정책을 의논하였다(『영조실록』 36년 9월 18일)(『영조실록』 37년 2월 16일).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의 공허지를 경작지로 분배할 즈음에 여러 전각이 철거되면서 흥정당 주변 행각과 함께 석음각도 소실되어 현재는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서울학연구』3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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