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어당(昔御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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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즉조당 동쪽에 위치한 중층 목조 건물.

개설

석어당(昔御堂)이라는 명칭은 ‘옛 왕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어 정릉동에 있는 행궁에서 머물던 전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덕수궁 석어당의 1층에는 고종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으며, 2층에는 1904년(광무 8)에 중건할 때 김성근(金聲根)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석어당이라 불리는 건물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다. 석어당 서편에 있는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덕수궁의 침전 건물로 사용되었다. 1904년에 중건된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진다. 석어당과 중화전 사이에는 행각으로 영역을 구분하였으나 현재는 철거되어서 볼 수 없다.

변천 및 현황

본래 석어당이라는 이름은 즉조당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773년(영조 49)에 영조가 ‘옛날에 왕이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에서 어필로 써서 즉조당에 현판으로 걸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9년 11월 4일). 1896년(고종 33)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수리를 지시하여 궁궐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때 경운궁에는 오로지 즉조당 하나뿐이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이때 즉조당 옆에 침전 건물을 건립하고 석어당의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고종 34)에 고종은 경운궁으로 임어하여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고, 석어당을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04년에 함녕전(咸寧殿)에서 화재가 일어나 경운궁에 있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는데, 이때 석어당도 즉조당·중화전 등과 함께 소실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화재 직후에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경운궁중수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 도설과 함께 정리되었다.

형태

중층 건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이다.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기둥 상부에는 익공을 형성하였다. 1층 지붕은 우진각 형태이며, 2층은 합각을 갖춘 팔작지붕이다. 지붕 용마루는 양성하지 않고 착고와 부고를 올려 형성하였다. 단청을 하지 않고 나무 느낌 그대로를 살려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18년(광해군 10)에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했을 당시 인목대비가 석어당에 거처하였다. 이때에 석어당은 즉조당을 의미한다.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은 이곳에서 인목대비에게 죄를 고하고 인조에게 옥새를 건넸다.

참고문헌

  • 『경운궁중수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