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군(舒川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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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군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서천군(舒川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에 속한 군이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이 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421호, 인구 1,876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9명, 진군(鎭軍) 224명이었다. 토지는 3,774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약 60%였다.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한산군과 비인현을 통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천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이었다. 서천에 있는 건지산성(乾止山城)은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곳 중 하나이다.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기도 해서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 756년(신라 경덕왕 16)에 행정구역명을 개편할 때 서림군(西林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지금의 임천 지역인 가림현(嘉林縣)의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나중에 감무를 두었다. 1314년(고려 충숙왕 1)에 고을 사람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에게 공로가 있었다 하여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격시켰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고쳤다. 만호가 주둔하는 군사거점이었다. 가장 큰 전함인 대맹선이 충청도에 11척 있었는데, 그 가운데 1척이 서천포에 주둔하였다. 15세기의 군정 현황을 보면 해안가이며 해상군사 거점임에도 선군(船軍)이 전혀 없었다. 선군은 다른 지역 병력으로 조달한 것으로 해상 못지않게 육상 방어도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 서천군에는 어량이 17개, 소금가마가 21개로 해산물과 소금 생산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이조와 병조가 함께 의논해서 문무관을 교대로 임명하는 연변 지역에 속하였다. 진관 체제에서는 홍주진관에 속하였으며 종4품 동첨절제사를 두었다. 서천포에는 종4품 만호 1명을 두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관속은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50명, 아전 30명, 지인 15명, 사령 15명, 관노 2명, 관비 3명이었다.

변천

조선시대 내내 군을 유지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모시 직조업도 성행하였다. 1759년(영조 35)의 기묘장적(己卯帳籍)에 의하면 11개 면이 있었다. 가호는 편호 4,025호, 인구는 남자 6,021명, 여자 5,560명이었다. 토지는 밭 2,342결, 논 2,937결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소속이 되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한산과 비인을 합쳐서 서천군으로 하였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서천군지(舒川郡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