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록(김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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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김기종(金起宗)이 이괄의 난을 토벌한 기록.

개설

이 책은 김기종(金起宗)이 이괄의 난 당시 장만의 도원수(都元帥)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무공을 세운 뒤 토벌기록을 편찬한 것이다. 김기종의 자는 중윤(仲胤)이고, 호는 청하(聽荷)이며, 시호 충정(忠定)이다. 서울 출생으로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정자(正字)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 도원수장만(張晩)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영해군(瀛海君)에 봉군(封君) 되었고, 관직이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서지 사항

1책(3l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공신도감자본(功臣都監字本)이다. 크기는 세로 33.3cm, 가로 21.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서정록』의 내용은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과정을 적은 것이다. 이 책에는 난의 고변(告變)으로부터 토평 후의 논공행상에 이르기까지의 전후시말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문회이우등상변적괄(文晦李佑等上變賊适), 이괄난 토평(李适亂 討平), 논공행상(論功行賞), 역모규모(逆謀規模)’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난의 역사적 배경은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 등의 대북 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과 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귀(李貴)ㆍ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괄 등 서인 세력이 패륜 행위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반정이 성공한 후 김유, 이귀, 김자점 등은 논공행상에서 실질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을 세운 이괄을 배척하였다. 이에 이괄은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라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괄의 군대는 1624년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괄의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였다. 이괄의 난은 결국 도원수장만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방에서 97명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23명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군병을 모집하거나, 군량을 수집해 보낸 사람도 39명에 이른다. 고창 출신의 선비 정춘령(鄭春齡)은 안재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무장김춘경(金春景)과 흥덕의 송붕(宋鵬) 등은 어가가 공주에 몽진할 때 왕을 호종하였다. 이외에 고창현에서 안진ㆍ유철견ㆍ조흡ㆍ정춘령, 무장현에서 강시언ㆍ강흔ㆍ김공망ㆍ김덕우ㆍ김여강ㆍ오전ㆍ김경철 등이 참여하였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고,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을 가서,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역모의 규모와 관련자의 색출에 초점을 두어 작성된 자료로서, 이괄의 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참고문헌

  • 이기화, 『고창의 맥』, 고창문화원, 1991.
  • 이영춘, 「인조반정 후에 파견된 책봉주청사의 기록과 외교 활동」, 『조선시대사학보』 59집, 조선시대사학회, 2011.
  • 한명기, 「17~8세기 한중관계와 인조반정 : 조선후기의 ‘인조반정 변무(辨誣)’ 문제」, 『한국사학보』 제13호, 고려사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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