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신법(西洋新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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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이 청나라에서 편찬한 역법.

개설

서양신법(西洋新法)은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湯若望], Johann Adam Schall von Bell)이 편찬한 『신법서양역서(新法西洋曆書)』를 바탕으로 만든 시헌력(時憲曆)을 말한다. 시헌력은 원래 청나라 역법인데, 1653년(효종 4)에 조선에도 도입하여 조선말까지 사용되었다. 시헌력은 1644년 청나라의 세조(世祖)가 중국을 통일하자 명나라 말에 『숭정역서(崇禎曆書)』 137권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아담 샬에게 이를 정리, 개편할 것을 명하여 『신법서양역서』 103권을 편찬케 하여 그다음 해부터 시행한 역법이다.

내용 및 특징

서양신법은 청나라에서 사용한 역법으로 그 이전의 역법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 코페르니쿠스[歌白尼] 체계가 아닌 브라헤[第谷]의 우주체계(宇宙體系)를 채택하였고, 둘째, 천체의 운동을 본륜(本輪)과 균륜(均輪)으로 그 지속을 설명하였으며, 셋째, 지구의 개념을 도입하여 달의 지반경차(地半徑差)라는 시차(視差)를 썼고, 넷째, 대기차(大氣差)를 도입하였으며, 다섯째, 계산에서 평면 및 구면(球面) 삼각법(三角法)을 사용하였고, 여섯째, 근일점(近日點)의 이동을 밝혔으며, 일곱째, 24절기에는 항기법(恒氣法)을 버리고 정기법(定氣法)을 도입하였다.

조선에서는 서양신법에 대해 1645년(인조 23)에 관상감 제조김육(金堉)의 사용 건의가 있었고, 1648년에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있다가(『인조실록』 26년 윤3월 7일) 1654년(효종 5)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서양신법인 청력(淸曆)으로의 개력(改曆)이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10년의 세월이 소요된 것은 시헌력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서양신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 가장 컸다. 그러나 초기에 가졌던 개력에 대한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10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시헌력이 반포되기까지는 관상감 제조김육과 관상감 관원 김상범(金尙范)의 노력이 지대했다. 요컨대 김육이 관상감 제조로서 서양신법인 시헌력의 사용을 주청한 인물이었다면, 김상범은 이를 실용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었다.

서양신법은 기존의 역법과는 달라 인조대에는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다. 1648년(인조 26)에 한흥일(韓興一)은 혼자서 청력이 옳다고 하면서 집안의 제삿날을 모두 청력에 의거하여 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무식한 것을 딱하게 여겼다고 전한다(『인조실록』 26년 윤3월 7일).

한흥일과 김육의 개력 주장에 이어 1645년 왕세자인 소현세자도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나 그로부터 기증받은 천문역법서를 가지고 돌아와 개력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후 시헌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김육은 1646년(인조 24)에 김상범 등 역관(曆官) 2인을 직접 대동하고 북경으로 갔다. 그러나 흠천감(欽天監)의 통제가 심하여 아담 샬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구할 수 있는 역서(曆書)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이 당시 김육 및 김상범과 함께 북경에 들어간 역관은 이점(李點)으로 추정된다. 역관 이점은 1653년(효종 4)에 시헌력이 실시되자 김상범과 함께 효종으로부터 그 공로를 치하받았다(『효종실록』 4년 1월 6일). 시헌역서를 구입해 가지고 온 후 김상범은 몇 년간 시헌력법에 대한 연구를 하고 그 대강을 터득했다고는 하나, 시헌력을 반포하는 데까지는 미흡했던 듯하다. 그런 이유로 김육은 1651년(효종 2)에 김상범을 다시 북경에 보내서 뇌물을 써서 역법을 배워오게 했고, 2년 뒤인 1653년에 김상범은 시헌력법대로 추산한 역서를 완성했다.

1653년에 시헌력법이 시행되었으나 시헌력법에 따른 역서가 곧바로 사용되지 못하고 그 이듬해부터 간행되어 반포된 것은 서양신법에 따른 시헌법(時憲法) 역계산이 정확히 맞는지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상범이 시헌력을 완성하자 관상감은 곧바로 반포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며 계산이 맞는지 검증하기를 요청했다. 관상감이 이러한 요청을 한 것은 한양의 일출시각과 중국의 일출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청력과 충분히 비교한 후 반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관상감은 새로 완성된 역서를 청력의 절기 시각과 대조한 후, 갑오년 역서, 즉 1654년의 역서부터 서양신법에 의거하여 새로운 역서를 간행했다(『효종실록』 3년 3월 11일).

변천

10년에 걸친 김상범과 관상감의 노력으로 1653년에 서양신법에 따른 개력이 결정되고 그 이듬해 역서부터 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에 관한 지식이 미흡했고 오성(五星)의 계산법도 얻지 못해 오성추보만은 구법(舊法)인 칠정산법(七政算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양신법인 시헌력의 완비를 위해 1655년(효종 6) 관상감의 요청으로 또다시 김상범을 북경에 보냈으나, 불행히도 김상범이 도중에 사망하여 수포로 돌아갔다(『효종실록』 6년 1월 16일). 서양신법은 김상범이 죽음으로써 해의 운행인 일전(日躔)과 달의 운행인 월리(月離)의 법이 미진한 채로 계산되었다. 이에 따라 달의 대소가 중국과 계속 다르게 되었고 이 일은 결국 관상감 관원들을 문책하는 일로까지 이어졌다.

김상범이 채 습득하지 못한 시헌력의 추보법을 배운 역관 허원은 1710년에 이를 『세초유휘(細草類彙)』란 책으로 간행했다. 『세초유휘』는 허원이 김상범의 행적을 따라 북경을 왕래하면서 배우는 동안에 서로 문답하고 쪽지에 적고 했던 것을 정리해서 편찬한 책이다. 허원은 서문에서 “이 책은 역을 추보하는 사람에게 마치 목수에 있어서의 먹줄이나 자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고 하여 시헌법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이와 같이 시헌력의 사용은 김상범, 허원 등 관상감 관원들이 그 계산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한 지 60여 년 만에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 한영호·이은희, 「『교식추보법가령』 연구」, 『동방학지』15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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