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라보(西水羅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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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경흥군에 속한 수군만호진.

개설

서수라보는 함경도에 속한 진보이다. 1552년(명종 7)에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이 서수라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서수라 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조선이 골간올적합에 보복하며 양자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곧 회복하였다. 그러나 골간올적합은 임진왜란을 틈타 1594년(선조 27) 7월에 또다시 공격하였다. 원래 서수라보에는 권관(權管)이 파견되었는데, 조선 말에 이곳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1881년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파견하였다.

변천 및 현황

서수라는 함경도 경흥진 노서면(蘆西面) 서수라리에 위치한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경흥 지역을 편입하였으나, 6진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이후에야 서수라가 개발되었다. 당시 인근의 조선 사람들이 여진인의 경내인 옛 경원의 후라둔도(厚羅屯島)와 서수라에서 조정에 진헌할 해채(海菜)·자해(紫蟹) 등을 채취하였는데, 1431년(세종 13) 이곳에서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과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백성들이 왕래할 때, 수호하는 군사를 보내기로 하였다(『세종실록』 13년 5월 13일).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때에는 아직 서수라에 진보가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흥부 남쪽 66리 지점인 서수라곶에 진변보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통해 최소한 세조대 이후 진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554년(명종 9) 8월에 우윤(右尹)이몽필(李夢弼)의 요청에 따라 권관을 처음 파견하기로 하였다(『명종실록』 9년 8월 19일).

서수라보성의 형태와 규모를 잘 알려주는 것은 『제승방략』이다. 여기에 의하면, 서수라보성의 둘레 1,270(약 385m), 여장(女墻) 99곳, 옹성(擁城) 5곳, 곡성(曲城) 2곳이다. 문은 남·북으로 2개가 있었고, 천정(泉井)이 1곳이다. 한편, 병력으로 토병(土兵)이 24명, 남쪽 지방에서 부방(赴防)하는 군사가 18명이었다. 성에 갖추어진 무기로는 궁자(弓子) 154장(張), 장전(長箭) 384부(部), 편전(片箭) 410부(部) 25개(介)이다. 조선후기의 『여지도서』에 의하면 석성으로 둘레 1,875척(약 568.2m), 높이 8척(약 2.4m)이었다고 한다. 현재 서수라보성은 함경북도 나선시 우암리 소재지 마을 남서쪽에 성벽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고, 북한 국가지정문화재보존급 제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수라보는 조선의 가장 동북쪽 끝에 있는 진보이므로 봉수(烽燧)와 역참(驛站) 등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서수라봉수는 경흥과 서울을 연결하는 제1거(炬)의 시발점이고, 보발(步撥)인 서수라참도 있어 위급한 사항을 경흥과 경성 지역에 알릴 수 있었다.

서수라보는 조선후기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조선 말에 이양선의 출현, 비적의 약탈, 러시아의 남진 정책 등으로 중요성이 높아졌다. 결국, 조선 조정은 1881년(고종 18) 윤7월에 수군만호로 승격하기로 하였다(『고종실록』 18년 윤7월 7일).

관련사건 및 일화

1552년(명종 7) 7월에 경흥부에 수재가 발생하여 경지가 부족해졌다. 부사김수문은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김순고와 의논하여 두만강 밖의 이응거도(伊應巨島)에 진을 설치하기 위해 이 지역에 거주하는 골간올적합을 내쫓았다. 골간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서수라에 돌입하여 40여 명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였다(『명종실록』 7년 7월 27일). 『제승방략』에 관련 사건이 더 정확하게 기재되었다. 골간올적합이 자피선(者皮船) 2백여 척을 타고 침입하여, 80여 명과 말 13필과 소 14마리를 사로잡아 갔다고 한다. 다른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제승방략』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수라 사건 이후에도 골간올적합이 자주 조선을 침입해 오는 등 조선과 여진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다. 특히, 조선 건국기부터 조선의 번리(藩籬)를 자처하고, 조선 역시 그렇게 인식했던 골간올적합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것은 조선이 두만강 유역 여진인에 대한 기존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명종은 일련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기존의 회유책을 유지하면서 이들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후 이들의 침입 기록 등이 보이지 않고, 골간올적합의 내조가 확인되며 한동안 이 지역에 평화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조선은 이들의 내조를 수용하거나 물품 등을 제공할 수 없었다. 결국, 골간올적합은 이 틈을 타고 1594년(선조 27) 7월에 서수라를 공격하였다(『선조실록』 27년 7월 19일).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지지(大東地志)』
  • 평화문제연구소 편,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8.
  • 한성주, 「조선 명종대 豆萬江 以北지역에 대한 '鎭' 설치 시도」, 『한일관계사연구』42, 2012.
  • 河內良弘, 『明代女眞史の硏究』, 同朋舍,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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