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군(瑞山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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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산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서산군(瑞山郡)은 조선시대 충청도 홍주목에 속한 군이다. 고려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가 되었고, 조선 1413년(태종 13)에 서산군이 되었다. 15세기에 호수가 489호, 인구가 1,887명이었다. 시위군(侍衛軍) 12명, 진군(鎭軍) 53명, 선군(船軍) 209명으로 선군의 비중이 높다. 토지는 7,283결인데, 이 가운데 논이 40% 정도였다. 1914년의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태안과 해미 지역을 병합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서산군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다. 통일신라시대 755년(신라 경덕왕 14)에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따랐으며, 1144년(고려 인종 21)에 현령을 두었다. 1182년(고려 명종 12)에 고을의 호장이 현령을 잡아 가두고 협박한 사건으로 강등되어 운주의 속현이 되었다. 1284년(고려 충렬왕 10)에 서산 출신인 대호군(大護軍)정인경(鄭仁卿)이 괴산과 신창에 침입한 몽골군을 습격해서 크게 승리한 공을 치하해서 지서산군사로 승격시켰다. 1308년에는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하였다. 하지만 2년 후인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전국의 목(牧)을 철폐함에 따라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고, 다시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강등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군의 지위를 유지하여 1413년에 서산군으로 고쳤다. 지곡현(地谷縣)을 속현으로 두었는데, 지곡현은 백제의 지육현(知六縣)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육현(地育縣)으로 고쳐 부성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지곡현으로 고쳤다. 해산물이 많이 났으며, 염소와 자기소·도기소가 있었다. 목장의 비중도 높아서 감목관을 설치하였다.

서산은 크고 부유한 군으로 행정, 교통, 산업 면에서 중요했을 뿐 아니라 첨절제사가 주둔하는 평신진을 설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른 고을에 비해 목에서 도호부, 군으로 승격과 강등이 심했던 것도 군으로 두기에는 행정적, 군사적 비중이 높아 군의 격을 정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는 강상 사건으로 인한 강등과 승격이 빈번하였는데, 교통과 상업의 요지이다 보니 그만큼 사회가 활발하고 갈등이 컸기 때문이다.

조직 및 역할

수령은 종4품 군수이다. 행정과 군사에서 중요한 지역이므로 문무관을 교대로 수령으로 파견하는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 40명, 아전 35명, 지인 21명, 사령 28명, 관노 13명, 관비 11명이 있었다. 평신진에는 종3품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또 충청도의 종6품 감목관을 두고 평신첨사가 겸하였다.

변천

1695년(숙종 21)에 이 고을에서 종이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해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년 후인 1713년(숙종 39)에 다시 군으로 회복되었다. 1733년(영조 9)에 읍인이 역모에 연루되어 또다시 10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42년(영조 18)에 군으로 회복되었다. 1777년(정조 즉위)에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정조실록』 즉위년 4월 7일), 다시 10년 후인 1785년(정조 9)에 복군되었다(『정조실록』 9년 1월 13일).

18세기에는 16개 면이 있었으며, 가호는 편호 6,620호, 인구는 남자 11,122명, 여자 13,636명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태안과 해미 지역의 일부를 병합해서 군의 규모가 커졌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