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書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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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을 진흥하고자 그 재학생에게 이름과 매일 독서한 내용을 적어 제출하게 한 제도.

개설

서도는 처음에 향교에서 시작되었다. 향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매일의 독서 진도를 적어 매월 보고하면 관찰사는 이를 근거로 시험하여 소재지 향교 교관인 교수·훈도의 근무성적을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예조(禮曹)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서도가 교육 진흥에 효과가 별로 없다고 여겨 나중에는 경쟁시험인 도회(都會)가 도입되었다. 서도는 중종대에 원점법과 결합하여 학생들을 학교로 끌어 모으는 데는 효과를 발휘했으나, 오히려 면학을 저해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내용 및 특징

서도는 원래 향교의 교생들이 매일의 독서 진도를 적어 매월 보고한 기록이었다. 관찰사는 이를 근거로 시험하여 교관인 교수·훈도의 근무 평가를 했고 예조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매일 읽은 책과 진도를 적고 이를 바탕으로 시험하는 것은 교육 진흥의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하여 1429년(세종 11) 도회를 설치하게 되었다[『세종실록』 11년 1월 3일]. 서도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던 데는 교생이 읽은 부분과 관찰사가 시험 본 부분이 일치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성종실록』 24년 3월 19일]. 하지만 서도에 비해 도회가 교육에는 좀 더 효과적이었는데, 이는 서도가 독서를 실제로 했는가 하는 사실 확인에 주안점을 두었던 반면 도회는 일종의 경쟁시험이었기 때문이다.

변천

1534년(중종 29) 좌의정한효원(韓效元) 등이 서도와 원점법(圓點法)을 결합한 「권학절목」을 보고함으로써 성균관에도 서도제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르면 “유생이 읽은 책은 날마다 서도하여 매달 말, 예조에 올려 장부에 기록하고, 불시에 돌아가면서 추생적간(抽栍摘奸), 즉 서도에 적어 낸 것 가운데 골라 제대로 독서했는지를 확인한다. 친림(親臨)하거나 명관(命官)이 주재하여 강(講)하게 하거나 제술(製述)하게 한다. 세초(歲抄)하거나 반년마다 통산하여 그 분수(分數)가 많은지 적은지를 따져서 점수가 높은 사람은 문과 초시에 가산점을 주는 급분(給分)의 혜택을 주기도 하고, 혹은 문과의 초시를 면제해 주는 직부회시(直赴會試)의 혜택을 주기도 한다. 불시에 시험하여 특별히 상을 내리며, 불통(不通), 즉 최하위 등급을 받은 사람에게 학벌(學罰)을 내린다.”고 하였다[『중종실록』 29년 11월 19일]. 이 조치로 성균관과 사부학당에 모이는 유생들의 숫자가 많아져 1536년(중종 31)에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제는 ‘유생들이 독서는 하지도 않고 서도를 채우는 데만 힘쓸 따름’이라는 것이었다[『중종실록』 31년 5월 20일].

원점법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을 기준으로 1점을 주었기에 생원과 진사들이 항상 성균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서도법이 시행된 뒤에는 서도로만 점수를 주기 때문에 이름을 적은 뒤에는 모두 성균관을 나와 밤에는 기숙사가 다 비었다. 또 이전의 도회는 관학(館學)에 이름이 올라 있는 자라면 빠짐없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서도법 시행 이후로는 서도에 점수가 높은 자만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다. 양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질적으로는 나빠져 유익함이 없다는 것이다. 삼공(三公)이 서도법을 굳게 하여 학문을 권장하자고 건의하였고 왕도 그러기를 바랐으나 반대자가 많아 실현되지 못하였다(『중종실록』32년 10월 24일).

관계망